"나 정도면 괜찮은 아빠지"를 달고 살았다.

초보아빠 가이드북

허리를 다치고 많이 아프고 울적한 기분이 들지만, 아내와 큼이 별이 덕분에 여전히 웃으며 지낸다.


그리고 허리가 아파서 꼼짝없이 누워있으며 혼자서 고군분투하는 아내의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허리를 다치기 이전에는 난 굉장히 부지런하게 움직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바로 커튼을 걷고, 환기를 위해서 창문을 열고, 빨래를 돌리고, 쓰레기통을 비우고, 별이가 잠에서 깨면 쉬를 누였다. 아내가 시키지 않아도 더럽고 힘든 일은 내가 먼저 했다. 스스로도 "난 부지런한 아빠야"라고 자신만만했었다.


그런데 허리가 다치고 침대에 누워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다치기 전이나 다치고 난 후나 내가 달라진 건 크게 없었다. 아내의 역할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애초에 아이들을 돌보고, 집안일을 하고, 요리를 하고, 그림 작업을 하는 모든 일들을 아내가 해왔었고 난 말 그대로 보조자적인 일만 해왔던 것이다.


아내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들을 옷 입히고, 투정을 부리면 달래고, 요리를 하고, 밥을 먹이고, 놀아주고, 책 읽어주고, 씻기고, 재우고 모든 것을 책임지고 있었다. 아침, 점심, 저녁 식사는 당연히 아내의 몫이었고 집안일에 관한 거의 대부분의 일을 아내가 담당하고 있었다. 그리고 필요한 물건이 있을 때, 어떤 걸 살지 고민하고 구매하는 것도 아내의 일이었고, 돈 관리를 하는 것도 아내가 전부 하고 있었다. 그림 작업을 하고 일을 하는 것도 작년 종합소득세 신고서를 확인해보면 아내가 나보다 더 많이 벌었다. 그리고 남편까지 챙겨야 했다.



그럼 내가 하는 일은 뭘까?



그러니까 나는 가끔 아이들과 농구를 하거나 술래잡기를 하며 놀아주고, "아, 아빠가 신나게 놀아줬다." 생색을 냈고


또 정말 어쩌다 한번 요리 같지도 않은 주먹밥을 한번 해놓고선 "아, 오늘은 아빠가 요리사다." 생색냈고


아내가 고민 고민하다가 산 물건이 택배로 와있으면 "아, 또 뭘 샀어요?" 라며 잔소리를 했다. (이건 절약정신이 아니라 구두쇠다.)


아이들을 어린이집 보내고 아내와 함께 일을 하려고 자리에 앉으면 일에 집중해야 한다며 컴퓨터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다. 아내는 일하는 동안에도 빨래가 끝나면 건조기에 넣으러 일어서고, 점심시간이 되면 식사 준비를 하러 일어났다.


허리고 다치고 나서야 아내와 나의 관계가 객관적으로 보였다. 그 이전에는 아내가 이런 대화를 시작하면 "나 같은 남편이 어딨어요?", "그래도 나 정도면 괜찮은 아빠지"라는 변명을 하고 말다툼으로 번져나갔다. 아빠 육아를 경험해봤다고 집에서 함께 있다고 나 스스로 "좋은 아빠"라고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니 난 그저 가부장적인 사고 관념에 사로잡힌 아빠였다. 단지 보통의 아빠들이 직장을 다니고 출근을 하고 야근을 하고 집 밖에 오래 있다는 점과 난 직장을 안 다니고 집안에 함께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었다. 집에 함께 있지만 별로 도움이 안 된다. 차라리 출근을 했다면 돈이라도 벌어올 텐데 말이다.


아내에게도 "우리는 수평적인 부부니까, 요리도 무조건 여보가 해야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요."라고 말해놓고선, 정작 식사시간에는 내가 먼저 식사 준비를 하지도 않고 '점심에는 어떤 요리를 할까?" 고민하지도 않았으며 식사를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도 전혀 갖지 않았다. 의례 아내가 요리를 하면 밥을 먹었고, 고작해야 "저녁에는 여보 힘드니까 배달시켜 먹을까요? 아니면 외식할까요?" 라면 낭비를 부추기곤 했다. 아니 왜, 내가 미리 요리해놓고 "밥 먹으세요."라고 말할 생각은 못했던 걸까?


내가 깨달은 생각들을 아내에게 나누자 아내는 펑펑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은 살아계시네요"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이 이해받는 느낌이라서 눈물이 났다고 했다. 자신이 먼저 말을 꺼냈다면 잔소리로 들렸을 텐데 이렇게 스스로 깨닫고 이야기해주어서 고맙다 한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루아침에 내가 환골탈태하지는 않겠지만 조금씩 바뀌려고 한다. 오늘 아침에는 새벽 6시에 알람을 맞추고 가장 먼저 일어나서 스크램블 에그를 하고, 감자볶음을 했다. 잠든 아내에게 커피를 타 주고, 아이들이 깨기 전에 식사 준비를 끝냈다. 하지만 아이들은 다 먹지도 않고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아내는 일어나자마자 어린이집 캠프 준비물을 챙기느라 식탁에 오질 못했다. 순간 "아! 밥부터 먹고 해요!"라고 버럭 할 뻔했다가 '아, 내가 어린이집 캠프 준비물을 미리 챙겨놓았으면 되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자 조용히 아내가 준비를 끝마치길 기다릴 수 있었다. 그리고 평소에 아내가 식사 준비를 하고 기다릴 때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아이들이 식사를 맛있게 안 할 때 섭섭했겠구나 싶었다.


앞으로 내가 얼마나 많이 변화할지 기대된다. 내가 변하는 만큼 아내도 나도 더 즐거운 인생을 만나게 될 테니.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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