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엄마는 추억을 위해 달립니다.
"얘들아. 이 사진 좀 봐봐. 지금 강원도에 눈이 이렇게나 쌓여있대."
"우리 밥 다 먹고, 떠나볼까?"
"오늘은 미술학원 하나밖에 없고, 하루쯤은 빠져도 괜찮을 거 같은데..."
아침밥을 먹다 말고 갑작스러운 엄마의 말에 당황한 표정을 짓는 아이들, 하지만 종종 있는 일이라 생각하고 고민에 빠지는건 아주 잠시 뿐, 곧 오케이 사인이 떨어진다. 그러고는 부리나케 뛰어가 각자 준비를 시작한다.
엄마인 나는 좀 더 바쁘다. 추운 눈밭에서 뒹굴고 놀다 보면 몸이 차가워질 테니 언 몸을 녹여줄 코코아가루와 뜨거운 물을 텀블러에 가득 챙긴다. 그리고 아이들 마실 따뜻한 보리차도 텀블러에 두병 담는다.
아이들 여벌옷과 수건은 항상 차에 넣어두었고, 어제도 눈놀이를 해서 젖어버린 장갑을 혹시 몰라 빨아서 건조기에 돌려두길 잘했다. 후다닥 챙겨 차에 타는데 20분이면 족하다.
금요일이니 조금이라도 지체하면 차가 막힐 거 같아, 아침 먹은 그릇들을 설거지도 못한 채 최대한 서둘렀다.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또, 이렇게 출발이다.
지난번 2주 전인가도 아이들과 평창으로 당일치기 눈 구경을 다녀왔었다. 화요일이었던 그날은 갈 때 3시간 10분 정도가 걸렸던 것 같다. 생각보다 막히지 않는다며 오늘도 그 마음으로 움직였거늘... 중간에 사고가 났는지 생각보다 차가 꽉 막혀 움직일 생각이 없다. 1시간이면 갈 거리를 2시간이 넘게 걸렸다. 예상했던 대로 터널에서 큰 사고가 났는지, 차 한 대가 전복되어 있었다. 3,4차선을 모두 막고 있었는데 차가 한 바퀴를 굴렀는지, 처참하게 부서져있었다. 등줄기가 서늘한 게 정신이 번쩍 든다. 오늘도 안전 운전해야지 다짐을 하며 뻥 뚫린 도로를 향해 액셀을 밟았다.
그렇게 5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평창. 눈이 쌓인 풍경이 너무나 멋져서 잊으래야 잊을 수가 없어 찾아오는 곳이다. 봄에는 봄이라서, 여름에는 여름이라서, 이곳에 오지 아니할 이유는 없다. 친정 엄마랑도 나들이를 왔었고, 어머니를 모시고도 왔었던 이곳. 그리고 우리 셋은 김포에서 평창까지 드라이브 삼아 틈틈이 자주 오는 곳이다. 그러고 보니 남편과의 추억은 없네? 추억을 더듬으며 글을 써 내려가는 지금, 새삼 알게 된 사실에 놀라울 뿐이다. 그렇게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그와 추억은 없다니...
우리가 가려고 하는 목적지는 삼양라운드힐이다. 정상전망대에 승용차를 가지고 올라가 탁 트인 정경을 만끽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웬걸, 눈이 많이 왔고 바람까지 불어 눈발로 인한 사고 예방을 위해 입장이 불가하단다. 보통 광장 주차장까지 올라가 매점 정도는 이용이 가능한데 오늘은 그 마저도 불가해 아예 일찌감치 차를 돌려야 했다.
전날까지 내린 눈의 양은 상당했고, 우리는 뛰어놀기 좋은 너른 들판의, 차를 대기 좋은 곳으로 자리를 잡고 놀준비를 시작했다. 차가 큰 편이라 주차할 만한 곳을 찾는 것도 쉽지 않아 최대한 다른 차들에게 피해 주지 않는 곳으로 주차를 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스키복을 입히고 장갑과 모자로 찬 바람을 맞설 준비를 시켰다. 혹시나 평창의 거센 바람에 감기라도 들고나면, 다 놀고 집으로 돌아가서도 후회막심이니 항상 그런 부분까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엄마란 사람은 그러하다.
우리 차에는 항상 대삽 2개가 실려있다. 이 삽만 있으면 아이들과 바닷가를 가서도 신나게 놀 수 있고 농장일을 하면서도 요긴하기에 항상 실고 다니는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물건이다. 아이를 키워본 사람은 알다시피 남자아이들의 넘치는 에너지는 어마무시하다. 그 에너지를 풀어줄 대삽 아니던가! 땅만 파라고 해도 하루종일 파고 또 파내려 갈 아이가 우리 집에는 둘이나 있다. 대삽 2개와 썰매를 챙겨 씩씩하게 걸어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이 오늘따라 더 든든하다.
이날 몇 시간을 내리 놀았는지, 차가 막힌 덕분에 휴게소에서 라면과 돈가스로 간단히 요기를 하고 와서 오히려 다행이었다. 우리는 허벅지까지 쑤욱하고 빨려 들어가는 눈이 쌓인 들판을 걷고 뒹굴며 놀았다. 땅을 파고 길을 내어 미끄럼틀을 탈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이글루를 만든다면서 땅을 파고 또 팠다. 눈이 많이 쌓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눈을 쌓아 담처럼 두르고 그 안에 몸을 쏙 숨겼다. 눈을 모으는 작업이 힘들 것 같아, 도우미를 자처했다. 하지만, 자기 작품에 손대는 걸 끔찍이도 싫어하는 첫째가 "엄마, 엄마는 거기 앉아서 구경만 해~~ 우리가 스스로 만들고 싶단 말이야." 라며 손사래를 친다. 그렇게 추운 평창의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의 작품이 완성되기를 무한정 기다려본다. 아이들의 해맑은 목소리와 끝없이 펼쳐진 흰 눈밭풍경, 어릴 적 할머니댁에 놀러 가면 논바닥을 경사지게 해 미끄럼틀로 만들어 비료 포대로 타고 또 탔던 눈미끄럼틀의 추억들이 문득 떠올랐다. 나중에 우리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지금의 이 기억들을 추억할 수 있으려나? 형제 둘이 깔깔대고 신나게 웃어대던 지금의 기억을 조금이나마 떠올려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엄마로서 작은 바람이다.
한참을 놀아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이들에게 잠시 차에 들어가 몸도 식힐 겸 따뜻한 코코아 한잔을 태워준다. 세상 가장 행복한 얼굴로 아이들은 따뜻하고 달달한 그 맛에 취하고 빠져든다.
이럴 때 "행복하지?" 하고 물어보면 "응!"하고 일동 합창이라도 하듯 대답한다.
그 말에 엄마는 힘이 나고 또 이 맛에 이렇게 달려온다. 아이들의 행복해 마다하지 않는 표정과 움직임을 내 눈에도 가득 담아본다. 이런 행복의 찰나의 기억들이 너와 나의 힘든 순간에, 큰 힘을 발휘할 거라는 것을 알기에...
오늘은 오는 길에 차가 막혔고, 아이들이 그냥 집으로 가기에는 아쉬운가 보다. 둘째 아들이 오늘은 여기서 하루 자고 가면 안 되냐며 운을 띄운다. 나도 슬며시 그러고 싶다. 내일은 남편의 라운딩이 있어 새벽부터 바쁜 날이니, 한번 물어나 볼까 싶어 문자를 했다. 성격상 웬만하면 내 선에서 정리를 했을 텐데, 내가 연락까지 한 데는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하는 눈치 빠르고 센스 있는 남편은 이왕 노는 거 신나게 놀다 오라며, 자기 걱정은 말란다. 바로 깨끗하고 안전한 숙소를 예약해 준 남편 덕분에, 우리는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과 맞물리는 차 막힘 걱정은 넣어두고 더 신나게 열심히 놀았다. 아이들의 목소리가 한 템포 더 올라간다.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지켜보는 나도 흐뭇하고 항상 이런 행복을 선사해 주는 남편에게 고맙다.
눈밭에서 5시간 정도를 놀았나 보다. "우리 내일을 위해서 오늘은 맛있는 저녁 먹고 쉬는 게 어떨까?" 아이들도 열심히 놀아서 인지 동의해 주었다. 우리는 맛있는 갈비를 먹고 숙소에 들어가 집에는 없는 TV를 신나게 보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엄마도 맥주 두 캔 단숨에 클리어!!
아이들은 중간중간 "아빠가 있었으면 이렇게 해줄 텐데..."라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항상 흥이 많고 파이팅이 넘치는 남편과의 놀이를 친구들과 노는 것만큼이나 즐거워하는 두 아들. 아이들한테 이런 말을 들으면 솔직히 잠시지만 서운하기도 하다. 그렇게 열심히 놀아줬더니, 듣는 말이라곤. 흥칫뿡!! 엄마의 기운은 성에 차지 않는 두 아들의 마음도 이해는 된다. 아이들도 함께 했을 때 더 즐거운 사람이 있는 법이니 말이다.
단합 잘 되는 남자 셋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는 생각보다 쏠쏠하다. 아이가 생기고, 그 아이가 아들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후에 생긴 소망이 있다면, 아들이 나이가 들어 사춘기가 오고, 어른이 되어도 아빠와 사이가 좋았으면, 엄마인 나보다 아빠와 더 돈독했으면 좋겠다였다. 보통은 남자들은 나이가 들면 아빠와 사이가 소원해지는데, 그런 게 아니라 꾸준히 소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그래서 아이들의 어릴 적부터 그런 부분을 특히나 노력하고 신경 써왔었다.
오늘도 아빠께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하다는 영상을 하나 띄운 채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어갔다.
푹 자고 일어난 다음 날. 간단히 아침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대관령 휴게소로 떠났다. 어쩌면 좋아! 새벽부터 부지런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모습들을 잊지 못한다. 우리가 신나게 놀았던 평일과는 다르게 토요일 아침의 평창은 확실히 많이 복잡했다. 얼른 차를 돌려 우리는 한번 더 삼양라운드힐로 갔다. 다행히 오늘은 광장주차장까지는 오픈해 주겠다고 한다. 대신 입장료를 좀 더 저렴하게 6천 원만 받는다고 한다. 평일에는 광장주차장까지는 무료였는데, 어쩔 수없다.
한참을 챙겨간 썰매를 타며 신나게 뛰어놀던 둘째가 "엄마, 우리 어릴 때 눈동이 만들었던 거 기억나?" 하고 묻는다. "그럼 기억나지~ 우리 엄마 키만큼 큰 눈사람 만들었잖아." 하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눈이 오면 무조건 스키복과 썰매를 챙겨 뛰어나갔다. 우리는 동네에서 가장 큰 눈사람을 만들어보자며 그날도 신나게 눈을 굴리고, 너무 큰 얼굴을 들어 올리지 못해 주변에 계신 어른께 부탁해서 함께 들어 올려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때 아이들은 그 눈사람을 눈동이라고 부르고 아직도 추억하고 있었다.
갑자기 그때가 떠오르면서 우리에겐 눈에 대한 추억이 생각보다 많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하는 시간만큼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 채워지길... 엄마인 내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무조건 긍정적인 방향으로 아이들을 이끌어주는 것이었다. "눈이 많이 와서, 추워서, 힘이 들어서 안된다는 부정적인 방향이 아니라, 눈이 많이 오니까, 추워도, 힘이 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내가 원하는 육아의 방향이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힘을 내어 나아가는 우리 가족의 모습이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가족이 아니었나 싶다.
10년 넘게 육아하며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날도 있었고, 내가 생각했던 대로 안되어서 속상했던 적도 있었다. 나를 발전시키는 삶이 아닌 타인을 발전시켜야만 하는 내 삶이 싫었던 적도 있었고,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게 흘러가서 마음이 아팠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항상 마지막에는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말로 힘을 내고 나아가 본다.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방향으로 마음을 먹는 순간 한줄기의 빛이 나에게 쏟아지는 거 마냥, 또 나아갈 힘이 주어진다.
이 또한 인생인 것 같다.
순간순간 힘을 내어 나아가다 보면 이 또한 지나가리라.
지나고 나서 뒤돌아 봤더니 그런대로 나쁘지 않더라.
그 순간이 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고, 우리의 소중한 추억이 남더라.
우리네 인생 또한 긍정적인 방향으로,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유유히 선순환하며 흘러가고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