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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릴리 Mar 08. 2024

아빠, 어디가?!

아빠와 추억이 쌓이면 생기는 일

 아빠도 엄마도 처음이었던 우리의 결혼초기, 갓 태어난 아기가 이쁜만큼 남편은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좋은 아빠는 아니었다. 내가 바라는 가정의 이상향에 훨씬 못 미쳤던 우리 가정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고, 아이도 이런 우리의 불안한 모습을 아는지 조용히 바삭바삭 메마른 감정의 소유자처럼 자라나는 것 같았다. 유난히도 조용했고, 소심했고, 부끄럼이 많았던 첫째 아이의 과거모습을 아는 사람은 지금 아이를 보면 많이 놀란다. 180도 달라진 밝고 경쾌한 아이의 목소리와 적극적이고 생동감이 넘쳐 흐르는 아이. 여전히 타고난 기질은 차분하지만, 표정이 달라진 아이를 보며 참 보기 좋다고, 과거의 기억을 들추어낼 때 잠시 그때의 우리 가족 모습을 되돌아보게 된다.


 결혼 초, 20대 후반의 결혼과 육아를 책으로 배워야 했던 우리는 참 많이 어렸고, 미숙했다. 서로 사랑해서 결혼하긴 했지만 유난히 결이 안맞는 나뭇바닥마냥  삐걱삐걱 맞춰가기도 버거운데 핏덩이 같은 아이는 태어났고, 너무나 사랑스러웠지만 그 사랑을 온몸과 마음으로 표현하기에는 우리는 한없이 부족했다. 남편의 육아참여도는 10% 정도로, 마지못해 해내는 정도였고 그 성적표는 첫째 아이 돌잔치에서 아이가 아빠에게 한 번도 가지 않고, 아빠가 다가오면 울부짖는 것으로 모든 것을 보여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3시간을 넘게 내 품에만 안겨있었던 우리의 작디작은 소중했던 내 아이. 남편은 많은 친척들과 내 친구들 앞에서 그들의 눈초리를 보며, 부끄러워 숨고싶었다고 시간이 흐르고 털어놓았다.

'암, 부끄러울 만도 하지... 그걸 아니 다행이다.' 하지만 이 또한 입 밖으로 내어놓는 내가 아니었다.

그렇게 난 서서히 마음의 문을 닫아가고 있었다.

그에게서, 우리 가족에게서...



 그러던 중, 주말부부를 해야 할 상황이 생겼다. 남편은 다행히 일적으로 상당히 능력 있는 편이었고, 자신이 속한 조직 안에서는 배울 게 없다고 느낀다며, 더 크고 넓은 지점으로 옮기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더 훨훨 날아가고 싶다는 그를, 내가 힘들다는 이유로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아이가 있다는 이유로 안된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한번 열심히 해봐." 그를 응원해 주고 더 나은 우리가 되길 소망할 당시, 내 뱃속에는 둘째 곰젤리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 년 동안 말도 못 할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는 있었다. 우리는 각자 자리에서 많은 일들을 겪어내며 부모로서, 어른으로서 조금씩 아픔을 딛고 성장해 가고 있었다. 남편은 가족 없는 타지 생활에서 가족이 참 많이 그리웠고, 아이와 함께 하지 못해 늘 미안함을 느끼며 스스로가 조금씩 달라지기로 마음을 먹었나 보다. 일 년 동안 워크숍이 있었던 한 주만 빼고 매 주말 아이를 보러 내려오며 유난히도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던 그가 새삼 다른 눈빛의 소유자였던 것을 서서히 느끼게 되었다. 스스로 바뀌고자 노력하니 그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고, 다른 아빠가 되어있었다.

아이는 참 많이 밝아지기 시작했다. 반짝반짝 윤이 나기 시작했다. 사랑받는 아이에게나 느껴질 법한 건강함과 행복함이 웃음에서 묻어나고 있었다.


 달라진 남편은 아이들 육아에도 꽤나 적극적으로 변했다. 주말에도 활력 넘치는 모습을 보여주며 아이들과 바깥놀이를 즐겼고 평일, 주말 가리지 않고 여유만 되면 여행을 추진했다. 우리는 일 년 동안 써야 할 휴가를 4,5월이면 다 쓸 정도로 추억을 쌓는데 여념이 없었다. 늦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바빴고, 더 정신없이 여행을 다니고, 아이들에게 행복한 기억을 심어주고자 고군분투했다.


 유난히도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은 모임도 많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 여행을 가는데, 3살이었던 첫째 아이를 데리고 가고 싶다고 했다. 1박 2일 여행이었는데, 남편 빼고는 대부분의 친구가 미혼인 시절이었고 엄마 없이 아이만 데리고 간다니 난 펄쩍뛰며 안된다고 했다. 둘째가 신생아일 때니 나와 아기는 당연히 갈 수 없었고, 첫째 아이가 너무 소중한 나머지 보낼 수도 없었던 것이다. 육아 성향이 너무 다른 우리를 알기에, 아이를 데리고 가도 내가 케어하는 것만큼 만족스럽지 않을 상황이 안 봐도 뻔히 보이니 아이를 보내기가 싫었다. 하지만, 아빠인 내가 있고 자신의 친구들도 있는데  뭐가 걱정이 많은 거냐고 박박 우기던 남편은 아이를 데리고 1박 2일 여행을 떠났다. 하루 뒤 아이의 꾀죄죄한 모습은 영락없이 집 잃은 아이였지만, 아빠와 함께한 추억 속에서 자신이 한 일들을 쉴새없이 자랑하는데, 눈빛이 살아있었다. 비록 고양이세수만 대충 하고 양치질도 하지 않은 아이가 들려주는 1박 2일 추억 속에는 참 많은 것들이 깨어있음을 느낀 후론 아빠와의 여행을 적극 장려하고, 나 또한 아이가 없어도 초조해하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단단함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다 남편 친구들이 하나 둘, 결혼하기 시작했고 아이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우리 아이들 밑으로 줄줄이 동생들이 생겨나면서, 아빠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서울 경기권 아빠들 네 명은, 그 당시 한참 유명한 TV프로였던  "아빠, 어디가?"를 따라 모임을 만들어 많게는 한 달에 두 번, 적게는 두세 달에 한번, 길게는 2박 3일, 짧게는 당일치기 등으로 아빠의  육아참여를 즐기고,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그 사이 엄마들은 각자만의 시간에 충실했고, 어쩌다는 따로, 또 같이 그녀들만의 추억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시간이 쌓이고 쌓이다 보니 아빠와 아이들은 추억이 쌓였고, 그들만의 우정도 생겼다.


 극 J 아빠들의 모임은 시작부터 남다르다. 회장인 남편을 시작으로, 네 명의 업무가 일목요연하게 분담되어 있어 진행도 착착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몇 주 전, 일정계획을 맡은 극 J의 아빠는 단톡방에 여행계획서를 올리고, 그 여행을 따르는 아빠는 숙소를 예약하기 시작한다. 아주 가끔은 키즈 풀빌라 같은  좋은 곳을 가지만, 보통 아빠들의 육아는 전투육아와 가깝다. 가평에 있는 대학생들이 주로 MT를 가는 숙소를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는 숙소들 까지. 숙소의 컨디션에는 큰 관심이 없는 아이들은 모이기만 하면 열심히 참 잘 뛰어논다.


남편의 극J 친구의 여행계획표 ( 남편 친구의 허락하에 올립니다.^^)

 아빠들의 여행에 가끔 엄마인 나도 참여한다. 오래 봐온 남편 친구들과 그들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생각 이상으로 즐겁다. 성향이 잘 맞는 사람의 아이들이라 그런지 , 아이들도 성향이 잘 맞고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나 또한 즐겁다. 딸이 없어 매일이 아쉬운 나는 여기서 다른 여자친구의 머리도 묶어주고 같이 인형놀이를 하며 잠시나마 대리만족도 느껴본다. 다른 집 아이들은 무얼 하며 하루하루를 보내는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아이의 생각도 들여다보게 되고, 내 아이도 이런 생각을 했었겠구나! 라며 지나버린 그 시간이 못내 아쉽고 참 소중하다. 모여서 사방치기나, 축구, 줄넘기 같은 체육활동을 시작으로 몸으로 말하기, 색칠하기, 장난감 놀이등의 숙소 안에서 하는 활동들도 가득하다. 어떤 날은 밤늦도록 밖에서 뛰어놀기도 하지만, 보통은 아빠들의 술자리를 위해 숙소에서 미디어시간을 갖기도 한다. 밤늦게까지 놀고 싶어도, 칼 같은 아빠들 덕분에 밤이 깊어오기 전에 아이들은 잠에 청하고, 아빠들은 다시 모여 그들만의 추억 만들기에 들어간다. 고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시작으로 대학교, 군대 시절 이야기까지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가 지겨울 법도 한데 들을 때마다 새롭고 재미나다.  


 엄마가 없는 곳에서의 아이들의 움직임은 더 재빠르고, 누군가가 제지하지 않는 자유분방한 곳에서의 일탈은 놀라울 정도로 경쾌해 보인다. 다녀와서 훈장을 내밀듯 다양한 경험을 풀어놓을 때면, 토끼눈을 하고 물개박수를 장착해 몇 옥타브는 올라간 목소리로 맞장구를 쳐주며 호응해 주는 것은 당연하다.

아빠와 아이가 함께 추억을 만들며 다양한 경험 속에서 부쩍 성장해 나가고 있음이 참 감사하다.

"아빠 어디 가?"의 장점을 알기에, 남편은 회사에서도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을 키우고 있는 친한 형들과 이런 모임을 하나 더 만들고 싶어 했지만, 생각보다 참여가 저조했다. 경험을 해본 우리는 의아했지만, 손바닥도 부딪혀야 소리가 나는 법! 가족모임은 많아도 아빠들과 아이들만의 모임은 좀처럼 성사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난 이후론 지금 모임이 참 소중하다.


 두 아이가 커 가는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아이들의 환한 미소와 밝게 빛나는 눈빛이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누구보다 더 절실히 느끼는 나로서는 아빠의 육아참여가 새삼 감사하다. 아빠의 파이팅 넘치는 전투육아 속에서 나날이 성장해 나가는 아이들의 미래를 오늘도 온 맘 다해 응원해 본다. 엄마가 빠진 그들만의 리그 속에서 어떤 찐 우정을 만들어 나갈지, 앞으로가 기대되는 것은 아마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번주말은 어디 가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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