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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근 Apr 01. 2024

아이를 위한 나라는 없다: 공간편 1

  출산을 한 친구에게 챙겨줄 물건들을 이것저것 포장해서 우체국으로 향했다. 평소 같으면 방문택배 서비스를 신청하면 되지만 명절을 앞두고 방문접수가 일시 중단되었다. 명절 연휴에 조리원에서 나오는 친구에게 꼭 필요한 물건들이라 시간을 지체할 수 없었다. 병원을 제외하고는 아이와 단 둘이서 하는 첫 외출이라 조금은 설렜다. 전날 인터넷을 통해 수집한 정보를 수집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았다. 집에서 우체국까지의 거리는 약 600m. 집에는 나 대신 아기를 봐줄 사람이 없어 5개월 아기와 우체국에 동행해야 한다. 아기띠를 하고 가기엔 날씨가 너무 춥고 짐이 무거웠다. 네이버 지도 거리뷰를 통해 집에서부터 우체국까지 유아차가 다닐 수 있는지 꼼꼼히 확인했다. 다행히 아파트 상가에는 엘리베이터가 있었고, 우체국에는 계단이 아닌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을 막기 위해 유아차에 방한커버를 하고 아이의 몸 위에 담요도 덮었다. 이제 잘 다녀올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순탄할 줄만 알았던 우체국 가는 길은 생각보다 고비가 많았다. 먼저 우리 동에 인접한 상가 엘리베이터가 고장이었다. 가깝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아파트 정문까지 가서 약 500m를 돌아 나와야 했다. 혼자 걸어 다닐 때에는 경사가 있는지도 몰랐던 인도는 좌우가 비스듬하게 기울어져 있었고, 본체 무게와 아기 무게를 더해 20kg가 넘는 유아차를 밀기에 버거웠다. 나는 유아차를 손에서 놓치지 않기 위해 팔에 힘을 꽉 주었다. 휠체어나 자전거 등이 지나갈 수 있도록 완만하게 포장된 턱은 생각보다 높아서 유아차바퀴를 발로 밀어줘야 했고, 간혹 삐뚤게 박혀 있는 보도블록에는 유아차바퀴가 걸렸다. 우체국에 경사로를 지나 문을 열 때에는 하필 문의 방향이 당겨야 열리게 설치되어 있어서 또 한 번 유아차가 미끄러지지 않게 긴장해야 했다. 나는 1km 남짓한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유아차를 밀며 보행 장애가 있는 분들의 불편함을 상상하게 됐다. 부끄럽지만 '어둠 속의 대화'라는 빛이 안 보이는 공간에서 진행되는 40분짜리 체험을 제외하고는 몸으로 누군가의 불편을 느껴본 일이 처음이었다. (유아차가 불편하게 지나가는 시각장애인을 위한 노랗고 울퉁불퉁한 블록은 우체국 입구부터 자취를 감췄는데, 유아차가 지나가기엔 편해졌지만 시각장애인들의 길이 끊긴다고 생각하니 아찔했다.) 유아차를 한 번 끌고 나갔을 뿐인데, 세상과 공간이 이리도 폭력적으로 설계되었음에 놀랐다.


  나는 짧은 이동 경험을 교훈 삼아 아기와 함께 외출할 때에는 아기와 함께 방문할 수 있는지, 편의 시설이 잘 되어 있는지 등을 미리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가령 유아차를 이용할 수 있는지, 외식을 할 때에는 아기의자가 있는지, 화장실에 기저귀 갈이대가 있는지와 같은 것들이다. 유아 편의시설의 유무에 따라 외출 시 챙겨가야 할 짐의 종류와 양이 결정된다. 그러다 보니 아기와 함께 외출하는 것만 생각해도 피로감이 쌓였고, 가급적 외출을 자제하는 편을 선택하게 되었다. 꼭 외출을 해야 할 경우엔 이왕이면 유아 편의시설이 잘 되어 있는 백화점이나 키즈카페, 패밀리 레스토랑 등을 이용하게 되었다. 육아를 하면 경제활동도 어려운 데다 안 그래도 돈이 들어가는 곳이 많은데, 외출할 때마다 유아와 그 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상업시설을 이용하게 되니 주머니 사정이 더 안 좋아지고 있다.


   아이를 데리고 외출을 할 때마다 절망한다. 노키즈존을 운영하는 카페나 식당은 어쩔 수 없이 못 가게 되었다. 나는 소심한 복수로 아기 없이 홀로 외출할 때에도 최대한 거르는(?) 방법을 통해 그 공간이 성업하지 못하기를 빈다. 노키즈존이라고 적혀있진 않지만 왠지 모르게 핫(?)해 보이는 곳에는 절로 쪼그라드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뒷 머리를 매만지며 "저기.. 혹시 아기도 들어가도 되나요?" 물어보기도 했다. "당연하죠"라는 스텝의 대답에 방문했던 공간에서는 "죄송한데 방금 주문한 음료 테이크아웃 해주세요"하고 금방 나오기도 했다. 아기가 "으아앙" 소리를 냈는데, 건너편에 앉은 사람의 표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소리가 나서 쳐다본 것일 수도 있는데, 아기와 함께한 것이 죄스러워 괜히 따가운 눈총처럼 느껴지는 날이 많았다.


  반면, 의외의 공간에서 환대를 받는 경우도 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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