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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턱대고 주사위를 굴려보는 때

내 인생의 부루마블

쌍둥이들이 달려온다. 사리 손으로, 주섬주섬 펼쳐놓은 부루마블 게임판이 보인다. 작은 두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묻는다.


(엄마, 부루마블 게임 같이 하면 안 돼?)


그때마다 답변은 '너희들끼리 해'로 퉁명스러운 말로 시작해서, 해야 할 일이 많다는 핑계로 끝낸다. 설레하며 달려왔을 발걸음은 어디로 가고 뒷모습에 시무룩함이 싣려 있다.


짠내 나는 뒷모습에 동했다가, 부루마블 게임으로 할 수 있는 공부들을 떠올려본다. 신나는 게임보다 불현듯 덧셈, 화폐 단위, 나라, 도시, 국기, 경제 등 교육으로 접근하는 거다. 욕망 엄마로 돌변해 이글거리는 눈빛을 장착하고 선심 쓰듯 루마블 앞에 앉아본다.


하지만 곧이어 나도 모르는 한숨을 내쉰다.

주사위를 굴려 다른 나라에 거뜬히 당도하는 마법은 더 이상 내 현실 속엔 없으니까.



1. 일단, 버거운 일상에서 빠져나가기도 쉽지 않다.

2. 여행에서의 고작 며칠이, 현실에서의 몇 달을

맞바꿀만한 자금력이라는 걸 받아들여야 한다.

3. 통장의 잔고가 보여주는 현재의 경제력과 여행으로 인해 생될 미래의 동력과 비전을 저울질하 설득는 과정을 거친다.

4. 모두에게 적당한 날짜를 셈한다.

5. 비행기 표를 비교, 검색하여 최고의 가성비와 최적의 노선으로 코스를 짠다.


게임을, 그저 게임으로만 즐길 수 없는 거니.


살뜰하게 저축하는 대신 여권에 스탬프를 채우며 뿌듯해하던 나의 20대. 무모하게 주사위를 내던지고 떠나던 그때처럼 말이다.


'돈도 안 모으고 시집은 어떻게 갈래'하는 핀잔을 뒤로하고 '어찌어찌 시집은 가겠지' 막연하게 답했다.


적금 연 이율 2%보다 20대의 월드와이드 한 경험치 이율은 200% 일거라 자신만만해했다.


그 생각의 끝은, 혼수를 준비해야 할 시점에 다 닿으니

무책임함과 의존성 지수 상승으로 이어졌지만. 모르쇠로 뒷짐을 지고서 가뿐히 결혼식 베일을 쓰던 철없는 신부가 되지만.



20대의 루마블 판 위로 주사위를 굴려봤다.


깜깜한 단칸방 숙소에서 바퀴벌레의 샤샤삭 소리에 놀라 곰팡이 핀 천장에 튀어 오를 뻔했던 필리핀.


취기에, 내 이름을 연신 불러대며 적대던 사람을 만났던 아테네 백패커하우스.


내가 발을 딛는 그 자리 자리마다 열렬히 삐그덕 삐그덕 소리로 반응하던 오스트리아의 낡은 호텔.

  

숙소비를 아껴볼 요량으로 중국 어학연수 중이던 친구의 하숙집 찬스를 썼던 중국.


차 안에서 새우잠 잤던 여러 밤, 미국 유학생에게 집을 빌려 소파 위에서 자던 몇 밤, 삐그덕 거리던 이 층침대에서 호사를 누린다며 좋아하던 게스트하우스 1박 스테이로 훑었던 미국 동부의 여러 도시.


5성급 호텔보다, 백패커 하우스. 레스토랑에서보다 길거리 음식들. 럭셔리함은 없이, 그저 여러 나라를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 누리겠다_일념 하나로 걷고 또 걷던 길. 자는 시간도 아까워 쪼개고 쪼개 한껏  욕심내던 라들.


미리 나누어주는 지폐 다발도,

주사위만 던지면 어느 나라든 도착해 있는 마법도,

게임판 위에서 지을 호텔, 빌딩, 별장 건물 아이템도,

황금열쇠 찬스도,

출발 지점에 다시금 도착하면 은행에서 주는 축하금도 없던 가난하고 지질하던 나의 루마블이었다.


하지만 패기가 넘쳤고 무턱대로 낙관적이었으며 그 와중에 꿈도 있었다.


알게 모르게 험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배짱은 두둑해졌으며 인생의 맷집도 쌓였을 테다.


남들이 쉽게 느끼는 불편감에, 둔감한 편이라 수월함이 있고 경험에 더 무게추를 두니, 난관에 쉽게 좌절하지 않는다. 


'어찌어찌 다 흘러가겠지.' 무던하게 말하지만 그 누구보다 상황엔 민첩하게 대응다.


별의별 나라 사람들을 많이 만나본 탓에, 능청스럽게 잘 친해진다.


다시 주사위를 굴려본다.



푸른 바다 위로, 발갛게 물들어지는 해에 감동하던 그리스 포세이돈 신전 위 내가 있고


비행기를 놓쳤어도 오만인 항공사 직원에게 손으로 뭉쳐먹는 오만 밥을 대접받았다며 좋아하던 무스캇에서의 내가 있다.


아테네에서의 집적남을 피해 예정에 없던 산토리니에 갔다가 텅 빈 겨울의 섬을 한껏 즐기던 내가 있고


다른 사람 시선 아랑곳하지 않고 싸이 말춤을 추며 돌고 돌던 두바이에서의 나도 있다.


그때의 나는, 여유롭거나 흡족하진 않았어도 매 순간 영롱하게 빛나고 있었다.


여행은 언제나 돈의 문제가 아니고
용기의 문제다.
-파울로 코엘료


매사 이것저것 저울질하지 말고,

모든 것에서 목적과 기능을 찾으려 하지 말고,

때로 그저 자유롭게, 가뿐하게 주사위를 던질 일이다.


30대, 40대, 50대 저마다의 부루마블로 의미가 더해지고 결국에는 나만의 그림으로 완성될 테니.


딛었던 여러 발자취들에서 의미를 찾고 낙관하며 긍정을 읽으면 될 일이었다.


우주에서 바라보는 지구 그 자체, 아름다운 블루마블(blue marble)처럼 멀리서 보면 희극. 빛나는 작품이 될 테니.


#부루마블

#육아일상

#여행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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