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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Feb 12. 2024

걷고 뛰고 오르는 시간

"말하면 더 싫고 쓸데없는 말인데 들어줘야 하고

무슨 말해야 하나,

생각해 내야 하는 것 자체가 중노동이야."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를 보면서 공감했던 대사 하나.


"모든 관계가 노동이에요"

고개를 끄덕였던 대사 둘.


서로 다른 범주의 사람들로만 일주일을 꽉 채워

모이고 마시고 떠들어댔던 때가 있었다.


내게 없던 고 스펙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인맥이

내 스펙이기라도 하는 양 의기양양해했던 시간.


정서적인 교감이랄 것도 없이, 무의미하게 왁자지껄했지만 크게 웃던 시간.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 모래알처럼 흩어져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지만

부질없었다_ 깨달음 하나 홀연히 남겨준 시간들 끝에, 내게 대부분의 관계가 중노동이 되었다.



그래서인지 지금 내게 남은 관계란 열 손가락 안에, 세알릴 수 있을 정도로 편협하다.


새롭게 쌓아 올리는 관계에, 심드렁해졌고

큰 의미를 두지 않은 채 입가에 형식적인 미소만 띠는 사이가 늘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예전만큼 폭넓지 않지만

깊다면 깊다고 할, 몇 안 되는 관계 속에서

끊으래야 끊을 수도 없이 얽히고설킨 인연 속에서

시시때때로 상처받는다는 것이

의아할 일이다.


상처 주는 몇 마디는 머릿속에서 맴돌고 맴돌다

마음속까지 기어이 후벼 파고 다.

생채기를 남겨 꽤 오래 마음이 심란해했다.

억울할 일이었다.


그러다,

버리지 못하고 삼키지 못해 첩첩이 쌓아둔 말들.

전문의라도 찾아가, 다친 마음을 의학적 측면에서 다독여보자 했으나

영혼 없는 리액션과 형식적인 스트레스 지수 검사표에 애먼 돈만 쏟아부었구나, 싶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막상 화장기 없는 맨 얼굴로,

무턱대고 찾은 길 위에서

예상치 못한 다독거림을 받은 때가 허다했다.


그래서 이제는 혼자만의 시간의 상당 부분을 산책길에 할애한다. 어느 배경에 있든, 혼자 걸을 만한 길을,

고요하게 거닐 시간대를 찾는다.


말하지 않아도 되고 들어줄 필요도 없는 시간.

대화의 공백을 어떻게 채워야 하나,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시간.

훑는 상대가 없으니 꾸미지 않아도 되는 시간.


요구하지 않고 온통 채워주기만 하는 든든한

친구를 만나는 듯한 시간.

'안녕' 무심하게 건네지만 힐끗힐끗 내게 눈을 떼지 않으며 촘촘하게 메워주는 시간.


내가 어떤 감정을 안고 마주해도,

'아무래도 괜찮아'_말하듯 담백한 시간.


산책길을 찾는 대부분의 나는

거친 호흡을 쏟아내다 가고

눈물을 훔치며 땅만 보고 걷다가만 가는데도

'내가 네 감정의 쓰레기통이냐!' 하며 싫은 내색 한번 없다.


그저, 계절에 따라 하루하루 미세하게 다른 풍경을 내어주고, 잊고 지내던 자연의 소리를 들려주면

그뿐이다.


움츠려들 대로

움츠려 들었던 마음을 다독거려 주다 산책길 끝자락에 닿을 때쯤 안온함을 안겨준다.



"혼자 걸어서 여행할 때처럼 완전히 살아 있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었고, 감히 표현하자면

그렇게 완전한 삶을 영위한 적도

그렇게 철저하게 나 자신이 되아본 적도 없었다.

-장 자크 루소 <고백록>


유유히 산책하는 동안, 점차 나만의 속도와 호흡을 찾고 딱 그 정도의 적당함으로 인생을 꾸려가겠노라 다짐한다. 불필요한 군더더기들은 다 걷어내 버리겠다, 태연함으로 무장한다.


그러다, 다짐했던 페이스를 잃으면 다시 어디든 걸으면 된다.


걷는 동안 눈에 담았던 들꽃들에게서 에너지를 받고

불어오는 바람에 잡념들을 씻어낸다. 비어진 여백에 다시 채워나갈 공간을 얻는다.


그렇게 걷고, 뛰고 마지막엔 계단을 오른다. 터질 듯 뛰는 심장에, 한결 가뿐해진다.


그런데 이상할 일이다. 걷는 내내 살뜰하게 행복했는데 계단을 오르는 5분 남짓의 시간이, 참으로 벅찬 게... 마치 클라이맥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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