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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희 Feb 08. 2024

일단 먹고 시작합시다

혼밥, 어디까지 먹어봤니

혼밥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이전부터, 혼밥이 주는 묘미를 즐겨왔다.  

    

‘언제 밥 한 번 먹자.’ 지나가는 말인지, 진심인 지

의중 파악부터 들어갈 번거로움 없이,

이 시간, 저 장소...'네가 와, 내가 가?'

조율할 필요 없이,

이 메뉴, 저 메뉴 타인의 취향 고려하며

배려로 시작할 필요 없이,

밥 먹는 도중 테이블 끝 계산서를 힐끗거리며

눈동자를 굴릴 필요 없이,

내 기분 날씨에 따라, 내 동선에 따라,

내게 허락되는 시간에 따라, 내 지갑 시정에 맞게,

시작부터 끝까지 그저 맛있기만 하면 되는 밥.     


고시원 비좁은 책상에서 먹던 전기밥솥 안, 누렇게 뜬 밥과 계란 프라이.

통역 아르바이트 중간, 교대로 힐 벗고 스타킹 신은 발을 오므리며 먹던 한솥도시락.

토익 학원가 근처, 천장이 낮은 골목식당에서

청국장 건더기 쓱쓱 비벼 먹던 보리밥.

두바이 5성급 호텔 박봉의 월급날마다, ‘오늘은, 나도 썬다’ 칼질로 기분내보던 스테이크.

길거리에서 산 투박한 빵과 과일을 무릎에 놓고 먹던 이탈리아에서의 골목길 혼밥.

아버지의 암 투병 소식을 국제전화로 접하고서 애써 모니터를 응시하며 먹었던 눈물의 사모사.

삼겹살을 굽다 부부싸움 도중 나가버린 남편 대신

더 노릇노릇, 살뜰하게 구워 먹던

분노의 삼겹살에, 소주 한 잔.

난자 채취 후 고속버스 터미널 옆에서 눈물을 머금고 자근자근 씹던 깍두기에, 갈비탕.

마음도 시리고 날도 추운 날에, 흠씬 흑설탕 뿌려먹는 팥 칼국수.

씹을 때마다 고소함이 터지는 수십 마리 보리새우를 토독거리면서 스트레스도 날려버리는

보리새우 부추전에, 막걸리 한 잔.     


행복이라는 것은 포도주 한 잔, 밤 한 알, 허름한 화덕, 바닷소리처럼 참으로 단순하고 소박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필요한 건 그것뿐이었다. 지금 한 순간이 행복하다고 느껴지게 하는데 필요한 것이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마음뿐이다.      

- 그리스인 조르바     


저마다의 밥들이 주는 다른 맛으로 미각을 깨우고

기운을 북돋아주는 에너지는 채워 넣으며

천천히, 오래도록 씹는 동안 내 마음 어느새 잔잔해지는 혼밥의 시간.

소소한 순간으로 잠시 행복에 젖어드는 시간.

식당 밖을 나서면 다시 고된 현실일 지언 정.


일단, 먹고 시작해 보자.


대신, 칼질은 평소보다 거칠게,

단짠 소스는 흠뻑,

야채 쌈은 미어터지도록 크게,

코는 알싸하도록,

더 노릇하고 바삭하게,

한 술 크게 담아 우걱우걱,

술을 털어 넣는 술잔 스냅 각도는 격하게,

식감은 최대한 살려가며 생생하게, 먹기로 한다.

남 시선은 의식하지 않고

가벼운 지갑 사정보다 오늘은, 조금 더 쓰기로 한다.


#혼밥

#일상

#일상에세이

#우울

#스트레스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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