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겪는 행복과 불행엔 총량이 정해져 있는 걸까_생각했던 적이 있다. 지독하게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20대 후반을 겪고 나서 그 생각은 시작됐다. 그리고 그 설마 했던 마음을 사주 봐주시던 어느 할머니에게 듣고 난 후 결론을 맺었다.
(그대의 20대 후반엔, 뭘 해도 잘 안됐었어.
끝에서 늘 잡고 있는 게 있었어.)
‘그렇다. 난 그때의 난, 유독 운이 없었다.’
외모가 정점을 찍었어야 할 그때였는데. 평생직장의 운이 한껏 모아졌어야 했던 그때였는데. 인생의 소울 메이트를 만나야 할 그때였는데! 하필 내 운이 그 모양이었다니... 오호, 통제라.
오만, 니즈와
물광 피부로 청초한 매력을 발산했어야 할 20대엔, 때 아닌 성인 여드름이 득시글했다. 애써 화장한 내 피부들 위로 발갛게 솟아오른 여드름과 숨 막히다며 아우성이던 모공들을 모두 안쓰러워할 정도였다.
전국구를 넘어서, 세계 곳곳 면접장을 누볐지만 꽤 자주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면접, 어디까지 가봤니? 서울을 넘어서, 아테네, 두바이까지 갔다... 나보다 더 멀리까지 가본 사람? 떨어진 그곳이 어디든, 최종 면접에서의 질문과 대답들을 곱씹으며 술을 마셨다.
연애운은 어땠을까. 만나는 남자들마다 어딘가 한 군데, 성한 구석이 없었다. 늘 썸은 신나게 탔다. 하지만 아직 직장의 갈피를 잡지 못한 20대 후반의 현 취준생 위치를 들키고 나면 쿨하게 끝이 났다. 결혼을 염두하고 사는 30대 초반의 애타는 속마음을 들키고 나면 늘 연락이 뜸해졌다.
억울할 노릇이었다. 어차피 달콤 쌉싸름했던 20대를 보내고 난 후 결과론적인 이야기일지라도.
(지금부터 내 운은 만개 직전이겠지.
곧 꽃 피우는 날이 올 거야.)
볼멘소리를 뱉어내던 내 인생에게 다독거렸다. 이제부터 내 인생은 고속도로 운빨이라고 했던 사주 할머니의 희망 메시지도 한 몫했다. 그런데, 막상 꽃을 틔워야 할 결정적인 순간들이 올 때마다 늘 뭔가 부족했다. 내달려야 할 운빨에 정체가 빈번했다.
20대의 꽤 많은 날들을, 여러 나라에 발도장을 찍으며 스쳐지나왔다. 적금으로 모으는 돈 대신 여권에 스탬프를 채웠다. 서울에 집 값을 내다 못해 두바이에서도 수개월 월세를 냈다. '돈도 안 모으고 시집은 어떻게 갈래' 핀잔이 들려왔지만 괜찮았다. 적금 연 이율 2%보다 20대의 월드와이드 한 경험치 이율은 200% 일거라며. ‘어찌어찌 시집은 가겠지' 막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결혼할 때가 되어 모아놓은 돈을 공개하는 시기가 되니 난 다급해졌다. 한없이 작아졌다. 혼수 장만할 돈은 없어도 내 머릿속 브루마블엔 두바이 호텔도, 산토리니 리조트도, 많이 지어놨노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우연한 곳에서, 운명의 상대를 만나 결혼에 이르렀다. 우리 집이라는 부르는 곳에 살게 되었다. 20대 중반, 고향집을 떠난 이후로 수많은 남의 집들을 떠돌다, 정착하게 된 내 집! 계란과 김, 흰쌀밥이 제공된다는 말에 경쟁력 있었던 고시원 단칸방, 외출한 사이 누군가 철장을 두어 개 절삭한 흔적을 발견하고선 뛰쳐나왔던 반지하 월세집, 공간을 나눠 세 사람이 살던 서울과 두바이에서의 셰어하우스까지... 계절 따라, 해에 따라 끊임없이 옮겼던 집 끝에 ‘우리 집’이 생겼다. 감격스러웠다. 월세 걱정은 없었고 평생을 약속한 소울 메이트가 있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하우스메이트들을 경험했던가. 화장실 바닥에, 매반 남기고 간 pubic hair 자취들로 다퉜던 한국인 룸메이트에서 매일 밤 춤과 노래로 흥에 겨워서 갈등이 일었던 필리핀 하우스메이트까지 다채로웠던 메이트 역사에 점을 찍었다.
하지만 신혼의 단꿈은 현실적인 생활 속 작은 흠집들로 묻혔다. 30년 이상을 따로 살다 1년 남짓 연애한 사람과 평생을 한 공간에서 함께 살기로 하다니. 무
슨 용기였을까. 대충 말아 정리한 드라이선과 중간에서 움푹 눌러 짠 치약, 뚜껑을 닫지 않고 그대로 둔 샴푸통. 화장실 한 평 남짓한 공간에서조차 사소한 분쟁거리들이 넘쳐나기 시작했다. 서로 다른 생활 습관으로 인한 일상의 투닥거림이 계속되었다. 때때로 누군가가 말하는 '내 인생의 소울메이트'는 일단 우리 집엔 없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애초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매일을, 매 순간을 함께 불협화음 없이 꾸려나간다는 건 어불성설이었을까. 게다가 결혼으로 인해 파생된 또 다른 관계들이 줄줄이 설상가상이었다.
양보와 타협으로 잠재운 후엔, 아이를 갖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엔 임신이 쉽게 응답하지 않았다. 신혼
은 즐겨야지! 하는 생각에 덜컥 생기면 어쩌나 내심 걱정하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대신 난소 기능 저하와 약물 앞에 저 반응 군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를 받았다. 인생은 난임이라는 암흑기를 건너게 했다. 날 난임이라는 미로 속으로 밀어 넣었다. 출구를 찾아 뛰던 내 앞으론 카드빚이라는 말이 놓였다. 난자 채취 실패라는 말도 가로막았다. 그런데도 나는 부산, 광주, 대구, 서울, 다시 광주까지 여러 도시를 헤매었다. 하지만 난 난임 환자들 중에서도 456번이었다. 난소 기능 저하가 극심했다. 이식은커녕 난자 채취에서도 처절한 실패가 잇달았다. 또다시 술을 마셨다. 제철음식을 안주로 내고 애써 위로했다. 그래도 즐거운 우리 집이 있잖아. 난자 공여까지 제안받은 난임 일상의 끝자락에서 가까스로 미로를 탈출했다. 그 미로의 끝엔, 서로 다른 심장이 둘, 뛰고 있었다. 쌍둥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