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은 정성으로

by 래소


연탄불 위 검은 약탕기에서는 한약이 달여지고 있었습니다. ‘이게 무슨 냄새야.’ 하고 코를 막고 집에 들어가던 기억이 있습니다. 다 끓여지면 면포에 싸서 손으로 비틀어 떨어지는 검은 물을 받던 어머니 손동작이 떠오릅니다. 흰 종이봉투에 한 첩씩 한약재가 들어 있었습니다. (약재를 세는 단위는 첩입니다. 스무 첩이 한 제입니다.) 봉투를 열면 모든 약재의 이름은 알 수 없었지만 감초, 대추 정도는 누구나 알아보았고, 눈 밝은 어르신들은 당귀, 천궁, 산약 등도 알아보셨습니다. 30년 전 일이지만 지금은 사라진 모습입니다. 우선 첩약으로 흰 종이에 싸서 주지 않고 첩 단위보다는 한 제를 기계식 약탕기에 달여서 일회용 파우치에 담아 택배로 발송합니다. 물론 직접 가지고 가시는 분도 있지만요.

간호사가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들고 당황한 표정으로 ‘○○환자분이 원장님과 통화를 하고 싶어 하세요. 택배로 보낸 약이 터졌다고 항의를 하셨어요’라며 저를 바꾸어 주었습니다.

“아니, 원장님 잘못은 아니지만 제가 너무 화가 나서 간호사에게 좀 퍼부었네요. 택배가 왔는데 약이 터져 있어요. 한두 봉이 아닙니다. 아까 간호사가 파우치 안 터진 거를 구별해서 씻어서 마시면 아무 문제는 없다고 말하는데 화가 났어요. 이 터진 약을 새로 교환해 주는 것이 아니고 터진 봉투, 안 터진 봉투를 제가 구별해서, 또 안 터진 거를 씻어서 먹어야 하나요? 택배사 잘못이니 배상은 택배사에 받으시고 제게는 약 새로 보내 주세요.”

“약이 터져서 난리도 아니었겠네요. 정리가 더 힘드시겠어요. 모두 버리세요. 제가 다시 약을 보내 드릴께요.”

“다음에는 택배를 꼼꼼히 싸세요. ‘약은 정성으로 먹는 것’인데 이렇게 지저분한 상자를 받으면 약 먹을 기분이 나겠어요.”

모두에게 기분이 좋은 일이 아닙니다. 간호사를 불러 다시 약을 달이도록 했습니다.

“터진 약 보상은 어떻게 처리할까요? 택배사에 전화하고, 탕약은 반송받을까요?”

“그 보상을 택배 배송 직원들 사비로 한다고 해요. 한 제 가격 다 받을 수도 없고, 재료비만 받느니 안 받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터진 약 반송받으면 그 약을 다시 쓸 수도 없는데 받아서 뭐 하겠어요. 우리 그냥 다시 약 보내 주고 잊어버립시다.”

“그래도 우리 한의원 손해가 얼마인데요. 우리만 손해 볼 수는 없잖아요.”

우리만 손해처럼 보이지만 모두가 손해입니다. 물질적 손해야 한의원에서 짊어졌지만, 택배기사분들은 터진 한약으로 옆에 있던 다른 상자에도 물이 들었을 것이고 배달하면서 그 환자분하고 실랑이가 벌어졌을 겁니다. 정신적, 물질적 손해 두 가지를 가진 것이지요. 그 환자분은 손해가 없어 보이나요? 물질적으로는 아무 손해가 없어 보이지만, 택배기사분에게 화를 냈고, 간호사에게 화를 냈고, 마지막으로 제게까지 화를 냈습니다. 하루에 화를 세 번이나 내었으니 심리적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그리고 새로운 약을 받아 드시더라도 그분 말씀처럼 ‘약은 정성’인데, 그 정성이 화난 몸에 들어가 약효가 발휘가 잘될 리가 없습니다. 모두의 손해를 안겨 준 원인은 누구의 잘못으로 비롯된 것일까요. 모두의 잘못입니다. 포장을 꼼꼼히 하지 못한 한의원, 수많은 물건을 빨리 배송해야만 하는 택배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툴게 물건을 다룬 택배사, 멀지 않은 곳인데 한약을 정성이라고 생각하지만 무겁게 들고 가기보다 편하게 택배로 받은 환자. 모두의 잘못이니 서로 이해하면 좋았겠지요. 택배 비용이 싸니 정신없이 물건이 다루어질 거라는 생각을 모두 같이 해야 합니다. 배송 사고와 물건 손상을 염두에 두고 이해의 폭을 넓혀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며칠 후 택배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단골 한의원 약 택배가 터졌는데 아무 말씀이 없어서 어찌 보상을 해야 하냐고요. 택배사에서 먼저 보상 이야기를 꺼내셔서 속으로 ‘조금이라도 받을까?’ (이렇게 생각을 한 번쯤 하게 되는 것이 인간 본능입니다.) 고민하다가 “저희, 단골이니까 조금만 조심히 다루어 주세요. 저희도 꼼꼼히 포장할게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전히 그곳과 택배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터진 약 받으신 환자분이요? 그 이후부터는 약을 직접 찾아가십니다. 저 또한 택배 원하시는 환자들에게 미리 말합니다. “택배는 안전 배달이 안 됩니다. 날이 더울 때 시일이 지체되어 상할 수도 있고, 터지기도 합니다. 다시 오셔서 찾아가시면 안 될까요?”

모두의 정신적, 물질적 안정을 위해 ‘약은 정성’으로 직접 들고 가 주세요.

* 이 글은 택배 이야기를 다룬 《까대기》(이종철, 보리 2019)를 읽고 영감을 받아 쓰게 된 글입니다.

<작은책>에 실렸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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