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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경심 Jan 06. 2024

어린 시절 불행했던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을 치유하며 살아간다

알프레드 아들러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행복했던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에 의해 치유받지만, 어린 시절 불행했던 사람은 평생 어린 시절을 치유하며 살아간다."


 너무 맞는 말이기에 서글퍼졌다. 나는 아들러가 말한 내용 중 후자인 사람이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 행복한 기억은 별로 없다. 허구한 날 이어지는 부모님의 싸움, 넉넉지 않은 경제적 상황,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학창 시절 등 생각하면 그저 씁쓸하다. 그렇다고 내가 매번 우울하고 의기소침했던 건 아니다. 사람의 내면이 딱 하나로만 귀결되는 것은 아니니까. 때론 자신감도 있었고, 밝고 긍정적이었다. 내가 오면 분위기가 밝아진다는 말도 자주 듣고 살았다. 하지만 행복하지 않았던 어린 시절로 인한 내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불안과 우울과 공허, 소외감 등은 언제나 내 삶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것들로 인해 가장 타격 크게 다가온 것은 바로 공황장애였다. 다행히 내면 아이 치유라는 기적을 만나 극복했고 그 과정을 책으로도 썼다. 책을 쓰고 인생이 완전히 변했다. 이제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렇게 치유가 완성되는구나 싶었다. 하지만 아들러의 말대로 나는 평생 치유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걸 절절히 느낀다.


 몇 해 전 직장 동료들과 다 함께 장례식장에 간 적이 있다. 내가 일하는 병원 청소를 해주시는 이모님의 남편분이 갑자기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장례식장으로 갈 때 동료의 차에 나 포함 다섯 명이 함께 탑승했다. 그들은 모두 나와 부서가 다른 이들이었다. 동료 A가 이런저런 소소한 이야기를 하는데 까르르르 한꺼번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만 빼고. 나는 동료들로 하여금 웃음이 터져 나오게 한 A의 말이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러자 기분이 좀 안 좋아졌다. 장례식장에 들어가서 상주분인 청소 이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왔다. 남편분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셔서 아직 현실감을 못 느끼시는 건지 상주분인 이모님은 겉으로는 덤덤해 보였다. 그런데 상주분도 울지 않는데 직장 동료들이 하나 둘 눈물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떤 일이 있어도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릴 것 같은 B마저. 나는 좀 어리둥절했다. 왜 나는 이런 상황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지? 대체 나는 왜 그들과 함께 공감하며 울지 못한 거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기분이 정말 말이 아니었다. 괴롭기까지 했다. 왜 이렇게까지 괴롭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내 기분이 곤두박질친 두 가지 상황으로 이야기해 보자.  


 먼저 장례식장에 가는 길에 나 혼자만 웃지 않은 상황.  나만 웃음이 터져 나오지 않는 건 그들과 내가 개그 코드가 맞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닌가? 평소 내가 우리 부서 동료들과 어울려 대화할 때 이런 경험이 많았던가? 절대 아니다. 함께 대화하고 웃는 맛에 직장을 다닌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니 이건 그냥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길만한 일이다. 다음으로 모두가 눈물 지을 때 나만 눈물 흘리지 못한 상황. 평소 청소이모님과 나는 이렇다 할 교류가 없었다. 나는 그분이 출근하기 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반면 다른 부서 동료들은 청소 이모님과 교류가 잦았다. 그 말은 함께 이야기 나누고 공감하며 정이 들었단 이야기다. 그만큼 그들에겐 청소 이모님의 남편 부고 소식이 더 가슴 아프게 다가왔을 확률이 높다. 물론 나와 교류를 많이 했든 안 했든 인간이라면 느끼는 측은지심으로 눈물 지을 수도 있지만 당시 나는 커다란 고민을 안 고 있던 터라 누구의 마음을 보듬을 여유가 없었기도 했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내가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이상하거나 공감을 못 한다고 치부하며 괴로워하기까지 할 상황은 아니었다.


 이렇게 결론짓고 나면 마음이 편해져야 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이성으로는 알겠지만 마음속에서는 끊임없이 정체를 알 수 없는 찜찜하고 더러운 감정이 솟구쳤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비슷한 감정을 내가 언제 느꼈을까?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며 그 감정을 온전히 느꼈다. 이것은 나 스스로 상처받은 내면아이를 치유해 가는 과정에서 터득한 방법이다.  명상을 하며 그 감정을 계속해서 느껴보는 것이다. 드디어 그 실마리를 찾았다. 나의 어린 시절 유치원 한 장면이 떠올랐다.


 어린 시절 나는 정말 예민하고 불안감이 많은 아이였다.  나는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언니 오빠는 학교에 가고, 부모님은 직장에 나갔다. 다섯 살 난 나는 집에서 혼자 엄마가 오기만을 간절히 바랐다. 그러다 여섯 살 즈음  엄마가 나를 유치원에 보냈다. 아마도 학기 중간에 간 것 같다. 유치원 아이들은 이미 그들끼리도 선생님하고도 라포가 충분히 형성된 시점이었다. 나는 주눅 들었다. 유치원이 너무 낯설고 불편했다. 종종 다른 반 선생님이(코끼리반 선생님이었다는 게 분명하게 기억난다) 쉬는 시간에 우리 교실에 방문했는데 그때마다 어흥~ 하며 호랑이 흉내를 내었다. 그러면 아이들은 꺄르르르 웃으며 우르르 도망갔다. 그리고 돌아서는 선생님을 다 같이 살금살금  따라가다가 선생님이 또 호랑이 흉내를 내며 다가오면 꺄르르르 웃으며 우르르 도망갔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하지 않고 그런 모습을 의자에 앉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게 재미있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이후 몇 번이나 같은 상황이 재연됐는데 한 번도 함께 합류해서 놀았던 기억이 없었고 얼마 안 있어 집안 사정으로 다른 유치원으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새롭게 간 유치원에서도 이런 비슷한 맥락의 상황이 계속 있었다. 당시에 그런 상황 속에서 내가 느낀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잘 몰랐는데 성인이 되어 생각해 보니 소외감이지 않았을까 싶다. 그것이 별거 아닌 것 같았지만  어린 나에게는 사실 큰 상처였다는 걸 알았다. 그 상처는 내 무의식에 단단히 자리 잡았고, 비슷한 상황이 재연될 때, 타인이 보면 별 거 아닐 수도 있는 상황에서조차 크게 반응하고 괴로워졌던 것이다.


 장례식장에서 내가 느꼈던 감정은 여섯 살 어린 내가 느낀 감정과 똑같은 것이다. 당시 해소되지 않았던 감정, 보살핌 받지 못했던 감정이 하염없이 올라와 나를 자꾸 흔들어 놓은 것이다. 오늘 이 글을 쓰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바로 오늘 아침에도 같은 감정이 올라와 괴로워졌기 때문이다. 나와 함께 하는 이들은 아마도 전혀 모를 것이다. 내가 소외감을 느낀다는 것을. 이렇게 써 놓고 보니 웃음까지 나온다. 정말이지 그들은 모를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소외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냥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이 감정을 어떻게 해소할지 고민 중에 진짜 이 감정의 뿌리가 그저 어린 시절 유치원 때 느낀 소외감 때문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뿌리를 'A의 원인은 B다.'라고 딱 떨어지게 설명할 순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타고난 기질, 여러 경험들, 여러 피드백들 모두가 한대 엉켜 지금의 내 감정 패턴이 되었을 터이다.


 오늘 아침 경험으로 생각해 볼 때, 내가 소외감을 느끼는 감정 안을 파고들어 가 보면 그들과 내가 함께라는 인식을 갖고 싶은 것 외에 또 다른 나의 욕구가 있다. 무조건적인 사랑을, 아주 특별한 사랑을 받고 싶은 욕구다. 주목받고 싶고,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강한 어린아이가 내 안에 살고 있다. 결국 이런 마음이 올라오는 건 내 안에 상처받은 아이가 다시 자신을 좀 바라봐 달라는 신호라는 걸 받아들여야겠다. '그래, 네가 특별해지고 싶구나. 그런데 말이야, 넌 원래 특별해. 아무것도 안 해도 아무런 성과를 안 내도 너는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 그냥 특별한 사람이야. 소중한 사람이야.'

 나에게 올라오는 감정을 유치한 것으로 치부하며 밀어내지 말자고 스스로 다짐한다. 그 마음을 온전히 받아 주는 것은 지금 내가 나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위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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