템플스테이에서 깨달은 타인의 삶, 그리고 꾸며진 나
책을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각 또한 정리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고요한 곳에 앉아 그저 내 안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져야겠다고. 그러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는 템플스테이였다. 어딘가 한적한 곳으로 여행을 가는 것도 좋지만 조금 더 체계적으로 일상과 벗어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너무 많은 자유가 주어져 핸드폰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작년에 북한산에 위치한 중흥사로 혼자 템플스테이를 떠난 적이 있었는데 그 때의 기억이 참 좋았던 것도 내 결정을 뒷받침해주었다.
이번에는 수원에 위치한 수원사로 떠났다. 보통 템플스테이는 휴식형과 체험형으로 나뉜다. 휴식형은 공양을 드리고 새벽의 예불이나 명상 등 몇 가지 기본적인 활동에만 참가하고 나머지는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고, 체험형은 절에서 기획한 프로그램을 그대로 따라가며 말 그대로 여러 활동을 체험해보는 것이다. 작년에는 휴식형을 신청해 고즈넉한 신사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냈으니 이번에는 체험형을 통해 절에서의 시간을 조금 더 알차게 보내보기로 했다.
템플 스테이에서의 첫 날. 뉴스레터 마감으로 인해 조금 늦게 절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이었다. 공양 시간을 놓쳐 아쉬웠지만 법고 체험시간부터 프로그램에 참여하기로 했다. 법고라는 악기를 안 것도, 본 것도 태어나 처음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크다는 게 내가 느낀 첫 인상이었다. 법고는 '무음(無音)의 부처님 소리'라 불릴 만큼 불교에서는 상징적인 용구라고 한다. 그야말로 평범한 악기가 아닌 신성한 의식을 위한 도구인 셈이다.
어쨌든 신기했던 법고 체험 후 저녁에 스님과의 차담 시간이 있었다. 약 10명 남짓한 참가자들이 스님을 필두로 둥글게 앉아 서로의 고민을 나누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의 고민을 듣고 조언을 해주셨다. 고등학생 친구들은 어떻게 성적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을지, 조급한 마음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 등 학교 생활에서 겪을 만한 고민을, 이제 막 회사에 들어간 친구들은 어떻게 다시 목표를 만들어 스스로를 동기부여할 수 있을지, 어떻게 더 빨리 성장할 수 있을지 등 사회 초년생시절 누구나가 품어봤을 공감되는 고민을 들려주었다.
드디어 다가온 내 차례. 내 입에서 나간 질문은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사실 내 차례가 오기 전부터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고민하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질문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평상시에는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막상 스님 앞에 서니 내 안에 꽁꽁 숨겨두었던 날 것의 질문이 있는 그대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다.
"스님, 제 삶은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워요. 없는 형편에 운이 좋아 장학금을 받으며 유학도 다녀왔고, 좋은 성적으로 졸업도 하고, 현지에서 내로라하는 기업에 취업해서 일도 해보고, 귀국 후에도 좋은 회사에 들어가고, 동료들도 참 좋은 사람들이고, 가족들과의 사이도 좋고 너무나 행복한데.. 가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인생이 어떻게 이렇게 허무하고 공허한지..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요. 우울증처럼 괴로움에서 비롯되는 죽음이 아니라, 진짜 말 그대로 이유를 찾지 못해서 생각나는 죽음인 것 같아요.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런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는가. 어떤 말을 할 때의 내가 나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 지금 이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지? 평상시에는 생각하지 않던 생각이 내 입을 통해 너무도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다는 이질감에 몸서리가 쳐졌다. 보이지 않아도 존재했던 거다. 그런 어둡고 끈적하고, 너무도 무거워 심연으로 가라앉을 것 같은 그런 생각들이.
당신은 자신의 삶을 살고 있나요?
제가 보기에는 타인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여요.
내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이 충격적이었다. 죽음에 대한 질문은 삶에 대한 질문으로 되돌아왔다. 죽고 싶다는 마음은 살아 있는 나의 마음으로 다시 되돌아와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지금 내 삶은 무엇이고 타인의 삶은 무엇인지. 스님은 왜 내가 타인의 삶을 살아왔다고 말하시는 건지. 그 기준은 무엇이고, 그게 왜 죽고 싶은 마음으로 연결되는 것인지.
"살아야 하는 이유를 생각하면 인간은 자살을 선택해요. 우리는 우리가 선택해서 세상에 태어나는 게 아니에요. 태어났기 때문에 살아가는 거에요. 이유를 찾지 마세요. 그냥 스스로의 삶을 사세요. 타인에 의해서 정해지는 삶이 아니라 진짜 내 삶을 살아야 해요."
어렸을 때부터 '죽음'을 생각한 적이 종종 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주로 가난과 연결되어 있었다. 쥐꼬리만한 용돈을 몇 달 동안 모아 산 한 일본 작가의 일러스트집 원서. 처음 산 외국책에 너무나 좋아하던 작가의 일러스트가 담겨 있어 아끼느라 한두 번 읽고 책꽂이에 고이고이 보관해놓은 내 보물이 허술한 단칸방에 비가 새 쭈글쭈글해졌을 때 느꼈던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절망감. 친구들이 나이키, 아디다스 같은 브랜드 운동화를 신고 다닐 때 자꾸 감추고 싶어 발을 배배 꼬았던 시장표의 이름 없는 허름한 운동화에서 느낀 수치스러움. 그런 나를 자꾸 무리에서 소외시키고자 했던 악독했던 친구들. 교실에 혼자 남아 운동장에서 친구들이 줄넘기를 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어린 날의 나. 외로웠던 나.
그 아픔과 절망을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오랫동안 공부로 연결되었다. 공부를 하고, 유학을 가고, 번듯한 직장을 가지고 돈을 벌 수 있게 되면서 모든 것이 극복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목표가 있을 때는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었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고 나면 무기력증이 찾아올 때가 많았다. 일본에 있을 때는 취업 후에 큰 번아웃이 찾아왔고,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전략 발표처럼 큼직큼직한 일 이후에 눈에 띌 정도로 무기력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때가 있었다.
다시 스님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것은 정말 내 삶이었나? 거기서 깊은 깨달음이 왔다. 목표를 세우고 노력한 그 모든 과정이 타인의 기준에 연결되어 있었다는 깨달음. 공부를 잘해야 하는 것도, 좋은 대학에 가야 하는 것도, 좋은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 것도 모두 누군가가 얘기한 것이었다. 그렇게 해야 잘 살 수 있다고, 행복할 수 있다고. 회사에서 중요한 일들을 해내는 것 또한, 스스로가 명확히 그 일의 의미를 깊게 이해하고 있다기보다는 해야 하기에 죽기 살기로 매달린 영향이 더 컸다.
내 삶은 진정으로 내 삶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누가' 살았는가라는 기준으로 생각하면 그 삶은 내 삶이 맞았다. 그러나 진정 '내 의지대로' 살았는가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그건 내 삶이 아니었다. 개개인이 가진 다채로운 개성이 아닌 성적이라는 획일적인 숫자로 학생들을 판단했었던 선생님들의 의지였고, 재력을 보며 또래 집단 안에서 서로에게 급을 매기고자 했던 아이들의 의지였고, 모진 시선들 속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고자 사회의 기준에 나를 맞추고자 했던 '꾸며진 나'의 의지였다.
결국은 '꾸며진 나'와 '진짜 나'를 구별할 필요가 있었다. 누군가의 기준에 맞춰 자에 맞춘 듯 똑바르게 재단된 것이 아닌, 원래 모습의 삐뚤삐뚤하고, 모서리가 여기저기 튀어나온, 세상의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모양의 나. 그건 누구일까? 깊은 무기력증을 극복하기 위해서 찾아야 할 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