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구입하는 행위는 어디와 연결되어 있었을까. 우리집이 '책'의 집이 되었던 근본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 조금 더 과거를 파헤쳐보기로 한다.
대학교를 졸업 후 일본의 대학원에 입학해 2년간 일본에서 공부했다. 대학원생 때 연구에 필요한 책을 어느 정도 구입하기는 했으나 그게 생활을 불편하게 할 정도로 많지는 않았다. 언제 돌아갈지 모르는 기약 없는 해외 생활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짐을 늘리지 않으려고 했던 의도가 작용했던 것 같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책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은 사회인이 되고 나서, 그것도 2020년 이후이다. 코로나라는 미지의 바이러스가 세계에 퍼지면서 공포가 도시를 집어삼키던 때, 나는 많이 아팠다. 밤에는 쉽게 잠을 들 수가 없었고, 일을 할 땐 허리가 아파 오래 앉아 있을 수 없었으며, 화장실을 한 시간마다 가야 했다. 자궁근종 때문이었다. 근종이 내 몸에서 자라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코로나 시기 활동량이 줄고 극심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겹치며 3cm였던 근종은 기하급수적으로 자라 있었다. 결국 수술을 위해 회사를 휴직하고 귀국을 했다. 한국 병원에서 검사를 하며 잰 나의 근종 크기는 10cm였고, 의사 선생님은 바로 수술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수술이라니.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공포였다.
몸이 아프면 건강해지기 위한 방법을 강박적으로 찾게 된다. 로봇수술의 권위자라는 대학 병원 교수님을 찾아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4박 5일만에 퇴원했다. 그러나 퇴원 후 열이 38도까지 치솟아 다시 병원에 꼼짝없이 입원해야했다. 1주일간의 입원 생활. 체온도, 수치도 다 안정화되어 다시 퇴원을 했다. 다 잘 될 거라 믿었다. 이제는 회복하는 일만 남았다고. 그런데 퇴원 다음날 대량의 피를 보았다. 입고 있던 옷, 이불까지 주변의 모든 것이 피로 물들었던 날. 수술 자국이 터진 것일까 무서워 나는 하염 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었고 엄마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겨우겨우 119를 불러 병원에 다시 실려왔다. 그 새벽에 대학병원 응급실에서 밤을 쫄딱 새고 아침에 수혈을 받으면서.. 인생을 바꿔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책은 바로 여기로 이어진다.
내가 아팠던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나는 왜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었을까? 대학원 졸업 후 일본 사람도 들어가기 어렵다는 대기업 중 한 곳에 공채로 입사했다. 일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알고 있는 회사. 대우도 좋았고, 사람도 좋아 내 인생은 더할 나위 없이 잘 풀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너무 불안했다. 회사 사람들이 다 너무 평화로운 거다. 매일매일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만 그 이상의 자기계발을 하거나 노력을 쏟지는 않았다. 지금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걸로 괜찮은 걸까?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으로 돌아가야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려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실력과 경험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런데 회사는 자꾸 연차에 맞는 역할이 있다며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천천히 성장해도 괜찮다고. 지금 생각하면 정말 세상에 그런 회사가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좋은 곳이었다. 다만 내가 불안했을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강해졌기 때문에. 그러다가 수술을 하게 되면서 강제로 일을 쉬는 시간이 생겨버렸다. 일을 쉬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지금 쉬어도 괜찮을까 하는 다른 종류의 불안이 또 찾아오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쉬면서 정말 많은 책을 사고, 읽었다. 일본 회사에 복직을 하면서 책을 그대로 선편 소포로 일본 집에 부쳤다. 살풍경했던 도쿄의 집이 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런데 신기하게 안정감이 생겼다. 회사에서 일하며 느꼈던 불안은 온데 간데 없고 어떻게든 될 거라는 희망이 가득찼다. 이 시기에 책은 나의 불안을 잠재우면서 동시에 안정을 주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책은 역시 나를 지키는 수단이 맞았다. 일본에서 지낸 8년 중 6년을 함께 한 남자친구가 있었다. 학업도, 졸업도, 취업도 함께 했던 사람. 그 사람과의 관계로 인해 해외 생활을 지속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늘 괴로웠다. 그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었다. 내가 학업에 열중해 그와의 만남에 시큰둥하면 소리를 지르며 내가 얼마나 차가운 사람인지 비난의 화살을 쏟아부었고, 나 같은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남자는 세상에 없을 거라고 몇 번이고 말했다. 마치 주문처럼. 대구의 촌뜨기였던 내가 일본에 와서 대기업도 들어가고 인생을 필 수 있었던 것은 자신 덕분이며, 그렇기 때문에 너는 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도 자주 들었다. 나처럼 객관적인 사람은 없을 거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무려 6년이다. 6년이나 같은 얘기를 들으면? 믿음이 생긴다. 그것이 논리적이든 논리적이지 않든, 그가 하는 말이라면 맞겠지 하는 타협점이 생겨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일이 다 내 탓이 되었다. 여행을 가서 길을 못 찾으면 내가 감각이 없어서이고, 맛집을 찾아서 갔는데 맛이 없으면 내가 선택을 잘못해서이고, 그가 화가 나면 내가 너무 센스가 없고 차가운 사람이라서 그런 거라고, 정말 그렇게 믿었다. 그 과정에서 나는 '나'를 점점 잃어갔다.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나와 가장 가까운 사람에 대한 나쁜 얘기를 전하는 것은 마치 내 얼굴에 침을 뱉는 것과 같게 느껴졌다. 연인 사이의 일은 연인밖에 모르는 것이니 함부로 조언하지 않아야 한다는 그의 말에 동의하기도 했다. 우리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라면 그건 우리만이 알 수 있는 것이니 다른 사람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2020년 회사를 쉬고 한국에 돌아오게 되면서 처음으로, 그와 오랜 시간을 떨어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6년 동안의 연애가 그리 썩 좋은 것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바로 가족과의 진솔한 대화를 통해서.
처음으로,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했던 날. 누구보다 밝고 긍정적인 엄마는 "뭐 그런 개XX가 다 있냐"라며 욕을 하셨다. 언니는 말이 없었고, 형부는 화를 냈고, 조카는 이모가 불쌍하다고 말했다. 가족들의 반응을 보고 처음으로 깨달은 것이다. 우리의 연애는 정상적인 연애는 아니었다는 것을. 그 후 남자친구에게 이별을 고했고, 따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이제 와서 너의 말들이 가스라이팅이었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헤어지자, 라고 말하고 싶지도 않았고 큰 의미도 없을 것 같았다. 어차피 결론은 똑같기 때문에. 그러나 6년이나 만난 사람을 무 자르듯 하는 게 감정적으로 너무 힘들어 몇 달을 울었다. 과장해서 말하자면 내 몸의 반을 도려내는 느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와 헤어져야 했다. 내 삶을 살기 위해서.
그 때부터 책을 미친듯이 사고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까운 사람으로부터도 나를 지키지 못했던 이유는 스스로의 무지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를 몰랐기 때문에, 사회를 몰랐기 때문에, 나를 몰랐기 때문에. 그래서 책을 읽고 공부하는 것은 결국 나를 지키는 일이었다. 책을 사는 행위는 나를 지키지 못했던 불안과 꼭 붙어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