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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의미 Mar 14. 2022

청춘의 기억

불나방의 과거와 현재

나의 청춘은 찔러보기와 방황의 시기였다. 창작하는 글을 쓰고 싶어서 문예창작과를 가고 싶었으나 국립대에 가야 한다는 아버지의 엄포에 국문과를 지망했다. 국문과는 예상했던 것과 달리 ‘나랏말싸미~’를 줄줄 외며 중세국어를 배워야 했다.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벼 생각했다. 그럼 좀 더 쉽게 졸업하는 방법이 없을까 하는 기대에 심리학과를 복수 전공했다. 한자와 중세국어를 벗어날 요량으로 간 심리학과는 심리학 통계와 생물심리학을 맞닥뜨리면서 다시 한번 좌절을 안겨주었다.      


‘내 진로는 다른 곳에 있을 거야!’ 다른 진로를 찾아 여기저기 기웃거렸다. 졸업 후에 원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취직을 해서 돈을 벌자. 그런 후에 대학원에 가면 되겠지. 이런 단순한 생각으로 속기사를 하겠다면 학원에 등록했다. 한컴타자 600타 이상은 나오니 속기는 식은 죽 먹기지 하며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학원에 등록한 첫날, 내가 몹시 오만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도 노력하면 자격증 하나는 따겠지 싶어 아버지를 졸라 그 당시 가격으로 150만 원이 훌쩍 넘는 컴퓨터 속기 기계를 샀다. 그렇게 장비 빨을 가득 채운 후 학원을 1년 가까이 다녀 속기사 시험을 치렀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그 당시 남자 친구(현 남편) 품에 안겨 엉엉 울고 나자 이 길은 내 길이 아닌가벼 다시 뒤돌아섰다. 번개같이 빠른 포기였다.      


이 외에도 대학 시절의 상당 시간은 다른 길을 찾아 헤매는 하이에나의 자세로 닥치는 대로 배웠다. 한국어 강사 양성과정을 수료하며 한국어 강사의 꿈을 꾸었고, 미술치료과정을 수료하며 미술치료사의 꿈을 꾸었다. 배우는 순간은 마치 내가 그 분야의 전문가로 거듭날 것을 느꼈다. 새로운 시도는 좋았으나 끌고 나갈 뒷심이 부족했다.      


대학 졸업 후에도 도전은 계속되었다. 한국어 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에서 기차 타고 서울까지 왕복하며 K대학에서 한국어 강사 양성 수업을 들었다. 그러나 사회복지관에서 이주여성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봉사를 하다가 어느새 나의 꿈은 다문화 사회에 이바지하는 사람이 되는 것으로 바뀌었다.  길이 나의 최종 목적지라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다문화교육을 전공하는 대학원에 갔다. 국립대와는 비교할  없는 학비를 내야 했는데, 어느새 아버지는 과거에 했던 발언(국립대만 가야 지원해줄  있다) 잊으시고 사립대 학비를 보태주셨다. 새삼스레 죄송해지는 순간이다.      


다문화교육전공을 가지고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 직장에서 3년간 일을 하며 사회생활을 마무리했다. 이때의 나이가 30세였다. 되돌아보니 내 인생의 청춘은 이것저것 시도를 해보았으나 애석하게도 끝까지 살아남은 업(業)이 없었다. 신중하게 고민하고 준비하여 시작하기보다는 앞뒤 가리지 않고 돌격하는 모습이 불나방과 다름없었다.      


40대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청춘을 되돌아본다. 나의 청춘은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걱정과 무모한 도전의 콜라보였다. 뚜렷하게 이루어 놓은 게 없는 것 같다. 지나간 청춘이 모래성 위에 바람이 불어간 것처럼 흩어져버렸다. 그러나 이제 내 삶은 청춘의 불안 대신 안정을 갖추게 되었고, 청춘의 취업 대신 꿈에 대한 도전을 시작하게 되었다.      


물리적인 청춘은 벌써 지나갔지만 마음의 청춘은 이제 시작이다. 다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나를 움직이게 한다. 시작은 미약하나 끝은 창대해지길 기대해본다. 나는 전보다 연륜을 갖춘 불나방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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