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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안 Mar 30. 2024

기다리고 기억하는 사랑의 뒷모습

아니 에르노,『단순한 열정』


“도대체 현재란 어디에 있는 걸까? 나는 고통스러운 미래의 쾌락 속에 살고 있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모데라토 칸타빌레』의 주인공 안 데바라드는 어느 날 술집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현장을 목격한다. 남자가 자신의 연인을 권총으로 쏴 죽이고 눈물을 흘리며 시체에 입을 맞추는 파괴적인 장면을 마주한 뒤로, 항구 도시 공장주의 아내로서 틀에 박힌 일상을 보내온 안은 죽음을 열망할 정도로 강렬한 사랑이라는 관념에 매료된다. 그녀는 이후 매일같이 살인 사건이 일어난 술집을 드나들며 그곳에서 마주친 공장 노동자 쇼뱅과 사건의 경위를 추적하기 위한 대화를 나눈다. 사건을 재구성, 나아가 재현하고, 절대적 사랑을 성취하려는 안과 쇼뱅의 시도는 그러나 그들이 주고받는 언어 안에만 머물 뿐이다.      

    아니 에르노가 A를 만나면서 느낀 감정은, 일견 안 데바라드가 꿈꾸던 극단적인 사랑의 실현처럼 보인다. 이 불꽃이 사그라들게 된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말할 정도의 열정. 그러나 안의 사랑이 상상 속에만 존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에르노의 열정 역시 현재성을 가지지 못한다.      

영화 <단순한 열정>의 스틸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단순한 열정』은 기억에 의존해 쓰인 소설이다. 지면 대부분은 에르노가 A를 기다리는 시간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다. 에르노는 A의 존재보다는 그 사이사이의 부재에 집중한다. 기다리거나, 기억하며. A가 존재했던 과거, 혹은 미래는 에르노에게 닿을 수 없는 지점, 멀리 떨어진 가상의 공간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시간은 공간과 달리 (적어도 인간의 인지 범위 내에서는) 선형적인 흐름을 지니므로, “현재를, 행복을 향해 열려 있던 과거로 바꾸어” 놓기 위해 A와 만나기 직전에 묵었던 호텔로 향하려는 에르노의 충동은 실재적인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다시 말해, 안 데바라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에르노가 시도하는 재현은 결코 온전히 이루어질 수 없다. 이 때문에 작가의 기억은 곧 허구 혹은 상상으로 치환된다. 소설을 관통하는 이 아이디어는 에르노가 낙태 수술을 받은 거리에 다시 방문한 경험을 서술하는 장면에서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나는 과거에 실제로 일어난 일과 허구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 가늠해 보았다.
소설 속 인물에 대해서는 직접 겪은 일이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그때 내가 여길 지나갔지’ 하는 구절이 나오더라도
미심쩍은 감정이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위의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단순한 열정』이 다름 아닌 소설이며, 에르노가 바로 자신이 지목한 바와 같이 소설 속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따라서 독자에게 에르노가 겪은 일들, 그녀가 소설이라는 언어로, 공간의 재방문이라는 행위로 완벽하게 재현하고자 하는 (그러나 그녀 자신도 그 재현의 불가능성을 아는) 과거의 기억은 허구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지위를 갖는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본격적인 내용에 들어가기에 앞서 에르노는 이렇게 썼다. “아마도 이번 글쓰기는 이런 정사 장면이 불러일으키는 어떤 인상, 또는 고통, 당혹스러움, 그리고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매달리게 될 것 같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단순한 열정』은 ‘포르노가 주는’ 인상이나 ‘도덕적 판단이' 유보된 상태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인상유보 자체에 대한 글이다. 에르노는 작가의 쓰는 행위와 독자의 읽는 행위 사이에는 “시간상의 차이”가 있기에, 이토록 솔직하고 내밀한 이야기를 쓰는 것은 “같은 시간대에 남들에게 자신을 드러내 보이고 싶어 하는 병적인 욕망”인 노출증과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소설의 창작과 소비라는 개념 자체가 에르노의 경험과 마찬가지로 과거 혹은 미래에만 존재하며, 따라서 현재의 작가/독자에게는 희끄무레한 인상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담대한 지성으로 열정을 낱낱이 해부하다     


    A의 등장 이후로, 에르노의 일상은 빛을 잃는다. 이전에 삶의 의미라 믿었던 일상은 흩어지고, 오로지 A를 기다리는 일로 재구성된다. 『고도를 기다리며』의 두 등장인물이 그랬듯, 이제는 목적을 위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기다림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그 목적이 곧 삶의 이유가 된다. 이 격렬한 하나의 텔로스로 인해 개인적, 역사적 시간은 해체되고, 좌표와 좌표 간의 연결은 사라진다. 그렇게 인간의 삶을 의미화하는 가장 기본적인 장치는 파편적이고 비선형적인 에르노의 서술 방식과 마찬가지로 산산이 분해된다.     

(출처 : 네이버 영화)

    대신 에르노는 A라는 존재에게 스스로를 예속시킴으로써 자신의 원초적인 본질을 되찾고자 한다. 프로이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이가 아버지의 규범에 종속됨으로써 마침내 사회적 정체성을 부여받듯이. 그렇기에 이 소설에서 A가 누군지, A와의 만남이 어떤지를 서술하는 일은 에르노에게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심지어 우리는 A가 Albert나 Adrian의 머리글자인지, 익명-anonyme를 의미하는 것인지, 단순히 알파벳의 가장 첫 글자인지조차 알 수 없다.) 삶, 존재, 세계의 연속성 따위도 마찬가지다.      

    중요한 것은 A로 인해 촉발되는 에르노의 치열한 심리 상태이다. 에르노는 A를 통해 이때껏 의식 없이 신뢰해 온 자기 삶의 진실성과 가치를 의심하고, 우리가 이행해야만 한다고 믿는 의무와 복종해야만 한다고 믿는 도덕이 얼마나 무너지기 쉬운 기반 위에 쌓여 있는가를 지적한다. 다시 말해, A에의 종속이, 더 정확히 말하자면 A에게 느끼는 감정에 대한 종속이 오히려 에르노에게 실존적인 자유를 허용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네이버 영화)

    이 모든 과정을 에르노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냉혹하게 기술한다. 작가의 문장은, 그 안에 담겨 있는 사건을 제외하고는, 어느 모로 봐도 불륜 관계에 몰두하는 정열적인 여인의 것이 아니다. 에르노는 몇 발짝 물러서서 차갑게 자신을, A를, 사회를 관조하며, 침착하고 예리하고 지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감정에 관해 썼지만, 결코 감정적이지 않다. 그러니 책 뒤표지에 쓰인 “임상적 해부에 버금가는 칼 같은 글쓰기로 치명적인 열정을 진단”했다는 문구는 이보다 더 적확할 수 없는 묘사이다.     

    내용과 형식의 이와 같은 충돌은 『단순한 열정』에 억센 에너지를 부여한다. 원제인 ‘Passion Simple’는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단순한, 어리석은, 이해하기 쉬운, 순수한, 솔직한, 보잘것없는 열정. 에르노가 써 내려간 열정은 ‘simple’가 가지는 무수한 의미에 전부 부합하는 동시에, 어느 의미에도 해당하지 않는다. 제목부터 참으로 역설적이지 않은가. 모순과 역설이 빚어내는 동력으로, 가장 사적인 감정에서 출발해 가장 공적인 의문까지 질주하는 『단순한 열정』은 분명 아니 에르노의 대표작이 될 자격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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