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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정연 Oct 28. 2020

모자를 쓰고

[물감과 타이프]

모자 속으로 숨고만 싶던 시절 ⓒ서정연


스무 살 무렵, 모자를 쓰지 않고서는 잠깐의 외출도 하지 않던 시기가 있었다. 모자를 아무렇게나 푹 눌러쓰고 챙이 만드는 그림자로 얼굴을 반쯤은 가리고 나서야 비로소 밖에 나갈 용기가 생기곤 했다. 물론 알고 있었다. 내가 모자를 쓰든 안 쓰든, 얼굴을 숨기려 애쓰든 말든 남들은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걸. 길에서 마주치는 수많은 이들에게 나는 그저 스치듯 지나가는 행인에 불과하다는 걸.


그러니까 나는 타인의 시선을 의식했다기보다는 뭐랄까, 자신이 없었던 거다. 고개를 똑바로 들고 세상 속으로 걸어 나갈 용기가. 아마도 그때의 나는 내가 많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스무 살이 넘어 성인이 되긴 했는데 내 삶은 아직 시작도 되지 않은 듯했고, 자주 암울했으며, 남들 앞에 나를 내보이기가 두려웠다. 모자를 쓰고 있으면 스스로 유령이나 투명인간이라도 된 것처럼 느껴져 조금 안심이 됐다.


“나는 오히려 궁금하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그리 아무렇지 않게 얼굴을 빳빳이 들고 다닐 수 있는지. 나로서는 그들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 내 방으로 돌아와서, 그러니까 혼자만의 공간에 남겨지게 될 때 나는 모자를 벗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을 가만히 응시한다. 그것은 너무나도 보잘 것 없는 동시에, 개별적으로 아름답다.”


고개를 수그리고 모자를 눌러쓴 채 자신의 발끝만, 혹은 땅 위에 길게 늘어진 그림자만 보고 걷는다는 것. 그때의 나는 어떤 암흑을 내내 들여다보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인지 세상이 종종 흑백으로 여겨지기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그때의 내가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 저 문장들이 전적으로 젊은 날의 호기였거나 위악이었다고만 생각하지 않는다. 당시의 나는 극도의 자기 비하와 자기애를 빈번히 오갔고, 그 둘은 마치 동전의 앞뒷면처럼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마음 상태일 테니까. 스스로를 내팽개치듯 아무렇게나 던져버리는 순간조차, 나는 나 자신을 혐오하면서도 지극히 사랑했던 것 같으니까. 누구나 조금은 그러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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