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보홀여행
필리핀 보홀 여행 버킷리스트중 하나는 졸리비에 가서 토마토 스파게티를 맛보는 것이다. 졸리비는 필리핀의 맥도날드라고 할 수 있다. 필리핀의 대표 패스트푸드점이라 현지 사람이라면 모를 리가 없는 곳이다. 우리 가족은 30년 전에 잠시 마닐라에 살았는데, 당시 아이들과 졸리비를 자주 가곤 했다 낯선 더운나라, 나와 다른 인종들이 사는 나라에 이방인으로 머문다는건 한편으론 신나기도 했지만 두려움도 있었다. 그런데 졸리비엔 필리핀의 평범한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이라 마치 내가 필리핀 사람이 된 착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장소였다. 필리핀의 어느 도시에서나 졸리비의 상징인 예쁜 벌 간판은 우리를 반겼다. 게다가 시원한 에어컨까지 있으니 안 들어가고는 못 배긴다.
솔직히 말하면 졸리비 스파게티는 고급 재료가 들어간 요즘 스파게티에 비해 한없이 초라하고 맛도 별로다. 처음 졸리비 스파게티를 먹어본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시는 먹지 않겠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30년전 추억의 맛을 기억하는 우리들은 다르다. 졸리비 스파게티 속에는 특별한 양념같은 추억이 진하게 버무려져 있어서다.
'다섯살, 여덟살의 어린 딸들이 조잘조잘 떠들며 내 손을 꼭 잡고 잰걸음으로 걷고 있다. 삼십 중반의 우리부부는 보기 좋게 젊다. 오토바이의 매연으로 가득한 거리,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이글거리는 태양, 저 멀리 졸리비 간판인 빨강색 꿀벌이 보인다. 아이들의 발걸음이 빨라진다. 더워서, 배고파서 점점 경보선수 걸음걸이로 변한다. 졸리비 매장 안에는 더운 나라 특유의 향이 있다. 카레향이 섞인 기름 냄새 같기도 하고 톡 쏘는 향신료 향인데, 쌀국수와 스프링롤이 연관 검색어처럼 떠오르기도 한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에 섞인 여러 가지 냄새에 잠깐 식욕이 사라진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면 아이들은 며칠 굶은 사람처럼 변한다. 입 주위에 묻은 붉은 토마토소스를 닦아주느라 내 입에는 음식이 들어갈 새가 없다. 돌아보니 참 행복한 시절이었다.
졸리비가 그토록 그리운 건 젊은 날로 시간여행을 할 수 있어서였다.
30년 전 일이 엊그제 같은데, 아이들과의 추억이 서린 졸리비에 갈 수 있다니! 우리가족 모두는 가물거리는 기억을 모두 꺼내어 이구동성 떠들어댔다. 재빠르게 아이들은 보홀 섬에 있을 졸리비의 위치부터 검색하고 저장을 한다. 역시 젊음이 좋다. 각자 다르게 기억되는 졸리비 스파게티 맛은 삼십년 전의 맛과 같을까?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두근댔다.
패키지 투어임에도 생각보다 자유시간이 많다. 살아봤던 옛 기억을 되살리고 사람 사는 곳이 다 똑같다는 생각을 하니 자신감이 올라왔다. 겁없이 작은 사고들을 치며 마닐라를 돌아다녔던 용감한 나를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보홀 패키지 여행가격은 가장 저렴한 것이 40만 원 정도다. 똑같은 패키지지만 두 배 이상 비싼 날짜도 있었다. 가장 저렴한 날짜를 빨리 선점했다. 스킨스쿠버 체험연습만 기본 옵션에 들어있었고 추가요금5만원을 내면 스노클링을 하고 버진 아일랜드여행이 가능했다. 셋째날 저녁도 크랩 특식으로 업그레이드 했다.
보홀로 향하는 비행기는 밤 10시에 출발해 새벽 3시가 되어서야 도착한다. 아무데서나 잘 자는 사람은 상관없겠지만 까딱하다간 날밤을 샐지도 모른다. 비교적 어디서나 잠을 잘 잤던 나였지만 그날따라 잠을 한숨도 못 잤다. 오랜만에 가는 여행이라 많이 설렜나? 하늘에 떠 있는 동안 고수리 작가의 ‘선명한 사랑’ 수필집을 끝까지 읽었다. 책방지기 선생님이 좋아하는 고수리 작가의 글은 몽글몽글 여행을 떠나는 내 마음처럼 따듯했다. 다음 주 책읽기 모임숙제를 마치니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창밖은 아직 깜깜하다. 샛별도 계속 한자리에 있다. 얼마나 더 날아가야 할까. 기내에는 거의 불이 꺼져 있어 하늘의 쏟아지는 별들을 볼 수 있었다. 드디어 땅 아래로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기장의 랜딩 맨트가 나왔다. 어찌나 기쁘던지! 부산에어 기장의 랜딩은 완벽했다. 흔들림 없는 착치로 몸이 하나도 흔들리지 않았다. 비행기에서 내리며 승무원들에게 최고라며 엄지 척을 했더니 기장에게 꼭 전달하겠다며 함박 웃는다. 모두들 피곤한데 웃어주는 그들이 고마웠다. 즐거운 여행이 될 징조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기내서 입고 있었던 겨울옷4명의 옷들을 한 꺼풀씩 벗겨내니 한 보따리다. 들고 다닐 보조가방 하나가 더 생겨버렸지만 한곳에 머물 예정이라 괜찮다. 건기 시즌인 3월의 필리핀 공기는 기분 좋게 선선했다. 습기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또다시 보홀을 방문한다면 또다시 3월 초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새벽 세 시 반, 공항밖엔 필리핀 여행사 직원들이 여행객들의 이름을 A4용지에 써서 들고 있다. 잠을 잘 시간에 일을 하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많다. 옅은 갈색 곱슬머리에 눈이 유독 커 보이는 필리핀 여행사 직원은 지루한 몸짓이었다가 우리가 입국장에 등장하자 눈빛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커다란 트렁크를 두 개 끄는 여행객 옆으로, 잠든 아이를 안고 있는 아빠의 모습도 보인다. 다들 치열한 일상을 살다가, 잠깐 마음도 생각도 비우려고 새벽 3시가 넘은 이 시간에 공항에 도착한 거겠지. 여기에 내린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여행을 즐기기, 저절로 기도가 나왔다. A4용지 일곱 개를 덕지덕지 이어 붙인 한 곳에 우리가족 이름이 있다. 알고 보니 익히 들어왔던 알만한 여행사 관광객들이 모두 한 팀이다. 우리숙소를 포함하면 모두 7개다. 예상치 않은 일은 그 사람들을 모두 한 버스에 태우고 각각의 숙소로 데려다주는 것이다. 당연히 우리 가족만 태우고 우리 숙소로 바로 갈 줄 알았는데. 당황스러웠다. 시계는 새벽 4시가 넘었는데, 7팀을 차례로 내려준다니. 가이드도 점점 지쳐가고 남아 있는 우리 팀들도 그랬다. 몇몇 사람들은 이런 경우는 처음 봤다며 볼멘소리를 했다. 내가 하고 싶던 말을 해 주니 속은 시원했다. 그런 일들로 버스를 탄 채 한 시간가량이 흘러가 버렸다.
우리 숙소인 솔레아 리조트는 다른 숙소들에 비해 외진 곳에 있었다. 아담한 숙소라서 우리가 탄 대형버스가 들어갈 수 없었다. 우리들은 3분정도 지프니를 더 타고서야 숙소에 도착했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 네 시 반이다. 별들이 쏟아지는 깜깜한 밤, 바리바리 짐을 들은 낯선 이들은 가이드를 따라 나란히 리조트로 들어갔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참 기괴해 보일 것이다. 줄줄이 앞사람 등만 보고 발걸음을 옮기는 우리도 그런 맘이었으니까. 여기저기서 하품소리와 기지개를 켜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환한 불빛이 보이고 사방이 툭 트인 리조트가 보였다. 입구 벽에는 거대한 문어그림이 그려져 있고 어디선가 휘리릭 바다냄새가 일었다. 차들이 다니는 입구의 정지 바(bar)는 그저 잠깐 멈춤의 의미로만 사용된다. 동네사람도 들어가려면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동네 개들도 리조트 로비 안에서 아주 느긋한 표정으로 늘어져 있다. '으흠, 이번엔 또 어떤 인간들이 왔냐? 참 고생들 한다. 이 밤중에…….'. 잠깐 고개를 들어 우리를 본 개들의 눈빛을 읽을 수 있었다. 가드들도 리조트 직원도 늘어져 잠을 자는 개들을 애써 쫓아내려 하지 않는다.
한국가이드는 개에게 물리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안내를 했는데 진심으로 소용이 없는 경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많은 동네 개들을 무슨 수로 피할 수 있을까. 어찌 보면 개들 입장에서는 우리가 그들의 마을을 침범한 불청객이었을 것이다. 그저 미안한 마음을 갖고 피해 다니는 것만이 상책이다.
숙소카드를 받은 건 새벽 4시 반이 지나서였다. 오후에 스킨스쿠버 체험교육이 있다고 했지만, 우리 가족은 그냥 자유여행을 하기로 마음을 모았다. 우리의 버킷리스트, 졸리비가 있기 때문이다. 아침 6시부터 조식이 나온다고 해서 조금 기다렸다 밥을 먹고 쉬기로 정했다.
피곤하긴 한데 웬일인 지 졸리지 않다. 웅성이던 스무 명 가량의 여행객들이 사라진 리조트는 다시 고요해졌다. 우리가족 네 명만 남았다. 깊게 숨을 들이켜 심호흡을 했다. 동이 트려는지 수영장과 연결되어 보이는 수평선이 가느다랗게 주홍색으로 변하고 있다. 민가 가운데 자리한 리조트에는 닭들의 울음소리가 아주 가깝게 들렸다. 매일 아침 우리들의 기상 나팔소리가 될 줄을 그때까지는 모르고 있었다.
아주 천천히 파란색 수영장과 야자수, 밝아지는 하늘을 만났다. 리조트와 맞닿아 있는 해변의 모래는 아주 곱다. 구멍으로 게들이 들락거린다. 여기서도 나는 훼방꾼이었다. 비행기에서 본 샛별은 아직도 빛을 내고 있고 수없이 많은 별들이 하나둘 태양빛에 스러진다. 깜깜해지면 다시 보일 별들은 낮에도 우리 머리위에서 빛을 보내고 있다. 보이지 않는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수평선에서 동이 트는 모습과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꼬꼬댁 닭울음소리, 희미하게 등장하고 있는 바다와 배들, 멀리 떠나왔음을 실감한다.
밥을 먹고 오전 내내 비몽사몽 잠을 잤다.
그토록 가고 싶었던 졸리비는 우리숙소에서 툭툭이로 10분이면 갈 수 있다. 근처에는 유명한 알로나 비치도 있다. 숙소에서 졸리비까지 걷기에는 좀 먼 거리다. 덜컹거리는 시멘트 도로 위로 툭툭이가 달린다. 예전과 다를 바 없는 풍경들이 기억을 꺼내온다. 상쾌한 바람, 작은 구멍가게들, 키 큰 야자수, 길거리 생선 굽는 연기, 부채질 하는 아낙들, 게으른 닭 울음소리 ,이제 막 잠에서 깬 천진한 어린 아이들,,필리핀에 왔구나!
저 멀리 졸리비가 보인다. ‘졸리비’가 ‘즐거운 벌’이라는 의미가 있던데, 열심히 살다가 명랑하게 놀러온 우리 가족을 쏙 빼닮았다. 앙증맞은 졸리비 간판, 다시 가슴이 두근거렸다.
65페소, 우리 돈 약 1650원, 필리핀 서민들이 즐겨 먹는 졸리비 스파게티가 테이블 위에 있다. 우와! 옛 맛 그대로인걸! 정말 반갑다 졸리비야! 하루 한 끼는 꼭 졸리비 스파게티를 먹고야 말거라고 우리는 무언의 눈짓을 주고받았다.
이제는 입을 닦아주지 않아도 되는 어른이 된 어른아이가 알아서 척척 내 앞에 졸리비 스파게티와 커피를 가져온다. 포크에 돌돌 말린 스파게티를 받아먹는 아이들은 이제 없다. 긴 줄을 서서 음식을 받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섭섭한 마음이 든다. 어쩌면 거꾸로 아이들이 내게 스파게티를 먹여주는 날이 오지 않을까. 내가 키웠던 아이들처럼 나도 흘리지 말로 맛있게 받아 먹어보리라. 짝을 만나 스파게티를 받아먹을 예쁜 아기를 낳아도 좋으련만…….
우리의 여행 첫날, 아직도 반나절이나 남아 있다. 알로나 비치 카페서 파인애플, 갈라망시, 부코 주스를 만난 후 하얀 바닷가를 걸어야지. 맑은 바다에 발도 담그고 깜깜해 지기 시작하면 로복 강의 반딧불도 보러가야지.
눈에 가슴에 모두 담아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