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6.19)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 글이라고 쓴 건, '편지' 였다. 누구나 편지로 글을 시작했을 수 있겠지만 내가 쓴 난생 처음의 '허구'는 돌아가신 할아버지에게 쓰는 편지였다. 어릴 때부터 그런 편지를 썼다. 내가 어떻게 지내고, 세상은 어떠하고, 주위 사람들의 안부는 이렇다. 구구절절. 묘자리 앞에서 내가 편지를 읽고 있으면 할머니와 부모님과 친척들은 다들 자기가 쓴 것처럼 뿌듯해하고 드라마의 한 장면인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미화했다.
나는 어렸음에도 알았다. 할머니와 아빠와 엄마가 성묘 갈 때마다 편지를 기대하고 요구하던 건 결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걸. 그렇다고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위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람이란 이렇게 비겁하구나. 치졸하고도 외롭구나.
나는 그래도 더욱 이쁨 받고 싶어, 내 편지를 읽는 사람들을 위해 글을 썼다. 어린 것이 참 기특하다고 했지만 나를 향한 칭찬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들이 위로 받은 것 같지도 않았다. 어떻게든 포장하고 연극처럼 살아가는 게 인생이구나. 자세하게 느껴내지는 못했겠지만 나는 틀림 없이 그 때, 편지를 쓰고 읽는 의식을 치러낼 때마다 칭찬도 받고, 다들 미소 짓고 있음에도 별로 기쁘지 않은 내 감정을 깨달았다.
언젠가부터 나는 편지 쓰는 것을 거부했다. 할머니는 서운해했고, 부모님은 내가 더이상 순수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 여겼다. 이내 성묘는 삭막하고 형식적인 행사가 되었다. 겉으로는 그랬다. 나는 차라리 홀가분했다. 삭막하지 않은 척 더이상 거짓말하지 않아도 되니까. 나는 시간이 지나 학생이 되면서 지나치리만큼 시니컬해졌다. 진실에 집착하고 신파를 경멸하고, 이만하면 살만한 것 처럼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보기 좋게 종이에 주워담는 글에 구역질이 났다.
그런 글을 쓴다고 해서, 당신들 진정으로 위로받는 거 아니잖아. 무언가 바뀔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자신을 속이면서 사는게 기특할 리 없잖아.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죽어서도 도움이 안 될 거잖아. 거짓말쟁이들! 강요하지 말아. 허상을 소리내어 쓰라고 하지 말아. 그런 분노가, 10대에는 걷잡을 수 없이 들끓었다. 그래서 아이답게, 학생답게 쓰라는 훈계를 정말이지 증오했다.
지금은, 20대의 나는, 바들바들 떤다. 수전증으로 글을 쓴다. 분노조차 이제는 아파서. 진실이든 거짓이든 누구에게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하고 결국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것만 같아서. 차라리 주체할 수 없이 화가 난다면 좋을텐데. 이 무력감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가. 정작 나는 위로 받은 적이 있나. 평생 한번이라도, 나는 내가 쓰는 글로 스스로를 위로 할 수 있을까. 진정한 위로라는 게 존재하긴 할까. 자신이 없다.
소리내어 쓴다. 할아버지. 아직도 저는 편지가 어려워요. 언제부터 희망을 잃어버렸는지 생각하면 벌써 철이 드는 걸요. 저는 사실 할아버지에게 단 한번도 편지를 쓴 적이 없다는 걸, 돌이켜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