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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Oct 10. 2021

너+나=우리

이 쉬운 공식을 왜 자꾸 잊고 사는걸까


90년대에 초등학교에 다녔던 또래들은 모두 기억할 것이다. 공동체라는 개념을 처음 배웠던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 그토록 강조했던 '너+나=우리'를. 어려서는 별생각 없이 그저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는 뜻 정도로 여겼다. 학교의 룰에 따라 랜덤으로 섞여 '반'이라는 소모임 속에서 1년을 잘 버텨내야 하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큰 숙제다. 버티지 못하겠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학년이 끝날 때까지는 아침부터 오후까지 내내 반 친구들과 붙어지내야 한다. 삼신할미가 부모에게 자식을 점지해 주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임의로 내 주변 사람들을 점지해 주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같은 반 구성원도 타고난 팔자 중 하나일지 모른다. 그런 환경에서의 '우리'는 물리적으로 묶여 있는 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한국 사회는 특히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거의 강요하다시피 중요한 가치로 주입시키지만 진정한 '우리'를 깨닫기에는 한없이 어려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너+나=우리'라는 공식의 핵심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너와 다른 내가, 나와 다른 네가 모여서 우리가 되고 우리는 나 혹은 너 일 때보다 힘이 세지고 다채로워진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방황의 시간을 거쳐야만 한다. 어른들의 사회에서도 아직까지 이 공식이 제대로 뿌리를 내렸는지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우리 사회는 '다르다'라는 사실에 너무도 인색하다. '다름'으로 인해 외면받고, 차별받고, 도태되고, 멸시당하는 일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너+나=우리'의 공식은 치환해 보면 '우리=나+너'이기도 하다. 누구나 자신을 인생의 주인으로 여겨야 함은 마땅하지만 이 세상의 주인은 자신이 아니다. 세상은 '나'와 비교할 수없이 수많은 '너'가 채운다.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너'를 마주하기도 하고 1년 중 365일을 '너'와 부딪히며 살아간다. 그렇게 많은 '너'에게 둘러싸여 살다 보니 나이를 먹을수록 '나'는 더 뚜렷해지고 커진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 '너'를 쉽게 정의 내리고 멋대로 분류한다. 




하지만 '너'는 '나'만큼이나 복잡하게 구성되어 있다.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도, 다 알 수도 없는 미지의 영역이다. 그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를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너'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나'일 것이라는 인정이다.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에게는 핑계와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너'의 잘못에는 비난과 질책을 하기 쉽다. '너'에게 피치 못할 사정이나 그럴 만한 연유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놓치기 쉽다는 것이다. '나'의 프레임에 따라 상대를 잘라내버린다. 나에게 축적된 데이터를 가지고 타인의 형태를 어렴풋이 그려낸다 한들 그것이 절대적일 수는 없다. 절대적일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며, 인간성이라는 것은 절대로 절대적이어서는 안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부분의 일상을 조직에 소속되어 조직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일하면서 보낸다. 본질적인 목표는 하나이나 그 수단과 방법은 첨예하게 다르다. 같은 조직 안에서도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팀들이 각각의 입장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 하나에도 여러 사람의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그러니 일을 하러 회사에 가도 늘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앓는 소리가 날 수밖에. 일을 하는데 방해가 되는 상대를 만나면 스스로 고민을 한다. 누가 잘못을 한 것인지, 내가 느끼는 감정이 부당함에 대한 정당한 반발인지, 내 방식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등등 나름의 자기검열을 해본다.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기 위해 나를 돌아보기도 하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고, 그나마 평화로운 답을 찾으면 꼭 '시스템이 문제'다. 차라리 이런 답이 나오면 공공의 적이 생기는 것이니 같이 욕하면서 전우애가 생긴다. 그럭저럭 괜찮은 답처럼 보이지만 입장이 다르면 결국은 다시 부딪힌다. 계속해서 시스템만 탓하기에는 일상이 너무 불행하고 다시 또 나를 탓하다가 상대를 비난하다가 갈팡질팡한다.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어쩌면 이 괴로움은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그것'으로 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반복되는 일상에 자의인 듯 타의인 듯 살아가다 보면 내가 사라지는 것만 같다. '진짜 나는 어디 있지?'하고 깨닫고 나서는 나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을 대한다. 그때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은 살아있는 인격체, 생명체가 아닌 '그것'으로 폄하된다. 그게 단순하고 쉽다. 굳이 어렵고 복잡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은 타인을 그저 하나의 대상, 객체로만 여기며 산다. 그 과정에서 고통받는 무수한 인격과 생명이 생겨난다는 사실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를 우리로 만드는 가장 큰 연결고리는 그런 마음이다. '공감'을 통해 타자를 단지 '그것'으로 보지 않을 수 있다.




아무리 지밖에 모르는 인간일지라도 지키고 싶은 한두 명의 사람쯤은 있기 마련이다. 나에겐 별 의미 없는 사람일지라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사람이다. 그런 마음으로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을 행동이나 행위 자체로 판단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은 타인에게 고통을 주지 않을 의무와 타인으로부터 고통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 무엇일까. 짐승이 무리 지어 사는 이유는 단순하다. 생존하기에 이롭도록 힘을 보태고 각자의 역할을 맡는다. 때문에 무리에 해가 되면 가차 없이 낙오된다. 하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다. 생존 때문에 무리 지어 사는 것을 넘어서 이제는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시스템에 의해 무리 짓고 산다. 내가 속할 무리를 직접 선택할 수 있고, 무리 안에서 해를 주더라도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나'는 수많은 '너'와 연결되어 하나의 무리 속에 산다. '나'의 영향력은 무리 전체에 전염되고 전파된다. 그렇게 '우리'가 된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될 때 종종 이런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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