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너무 작고 세상은 거대하다. 먹고사는 일만으로도 치열하기만 하다. 한 평생 내 몸 뉠 집 한 채 내 이름으로 사고, 죽을 때까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것뿐인데 한순간도 게으름 피우지 말라 한다. 젊어서 고생하면 나이 들어서 조금이나마 편안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해서 한 푼이라도 더 모아야 할 때라는 것도 안다. 세계 경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그 흐름에 올라타 똑똑하게 나의 자산을 만들어야 하는 것도 잘 안다. 그런 내용의 콘텐츠를 보고 듣고 하다 보면 내가 한 마리의 경주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그 경주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만 같은데 말이다.
사람마다 타고난 기질이 분명하게 존재한다. 타고난 것을 갈고닦을 줄 아는 성실함과 노력도 기질이다. 자아를 구성하고 있는 많은 요소들은 타고나거나 환경에 의해 생겨나고 다듬어진다. 요소들끼리 상호작용하여 또 다른 요소를 만들기도 하고 A라는 특성이 B라는 성향을 밀어내기도 한다. 그러한 합, 반의 경우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무한하고 16타입의 MBTI로 나누기에는 탈락되고 마는 고유성 또한 무한할 것이다. 그만큼 모든 사람이, 모든 인생이 그만의 고유성을 지닌다. 이 고유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야만 길고 긴 인생을 버틸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매 순간 나를 흔들고 또 흔들어댈 테니까.
나의 뇌를 이루고 있는 기관 또는 조직 중에 가장 둔하고 비활동적이며 제 역할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면 분명히 ‘수’와 관련되어 있을 것 같다. 때로는 종종, 때로는 자주, 때로는 매 순간 나는 이성보다 감성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내 삶과 세상을 바라보는 모든 시선에는 감성이라는 렌즈가 씌워진다. 언제나 감성이 우선적으로 자극받고 반응한다. 감성이 철저히 배제된 이성적 세계(여기서 말하는 대표적인 이성적 세계는 자본주의)에서 나는 철저히 낙오자다. 이 세계를 제대로 활용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사고방식을 나는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어서 절망의 나날을 보낸 적도 있었으나 지금은 그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 된다는 마음으로 타협점을 찾아 꾸준히 맴돌기로 했다. 어쨌든 나도 돈 없이는 살아갈 수 없으니까.
그렇다 해도 “20대에 1억 모으는 방법”, “무조건 오르는 주식 고르는 방법”, “3년 만에 200억 자산가가 되었다” 같은 제목에는 도무지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들의 노력을 폄하할 생각은 절대로 없지만 오로지 돈만 바라보고 사는 삶이 내게는 죽어있는 상태와 다름없다. 그런 삶을 살다가 부자가 되더라도 나는 잘 살아낼 자신이 없다.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위험한 환경에 노출되거나, 건강을 잃거나, 몇 안 되는 주변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다.(내게 그리 큰 관심과 기대를 가지고 있지도 않겠지만) 모두에게 주어진 완벽한 평등, 시간이라는 제한된 조건을 나를 위해 잘 쓰고 싶다. 잠자는 시간과 일하는 시간 외에 주어진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을 정치, 경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생각하는 데에만 쓰기도 싫고 나 같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갈 수도 없다. 사유 없는 일상은 울창한 숲과 힘찬 물줄기로 이루어진 정신과 마음을 꽁꽁 얼리고 소멸의 상태로 만든다.
세상은 반 이상이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20대에는 이렇게 살아야 하고 30대에는 저렇게 살아야 한다는 정석을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정석대로 살아가지 않는 이들의 이야기는 또 열렬하게 소비한다. 각종 미디어에서는 대기업을 퇴사하고 나와서 식당을 차린 20대 청년이나 전 재산을 모두 팔아 세계 일주 하는 젊은 부부, 직장을 나와 프리랜서로 살아가는 사람들에 포커스를 맞춘다. 대중이 그런 이야기에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당연하다. 대리만족 또는 남과 똑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위안, 정해진 길을 벗어나도 성공할 수 있다는 희망 때문이다. 물론 미디어가 주목하는 ‘길을 벗어난 사람들’은 사회적 성공이라는 우승컵을 거머쥔 소수의 사람들이라지만 남과 다른 인생을 소신 있게 살아낸 것만으로 대중의 주목을 받을 충분한 가치가 있다. 키포인트는 소신이다. 소신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날까.
노동의 가치가 점점 바닥으로 향하는 시대에 인간은 어떻게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 인간만이 가진 것들에 더 집중해야 할 것이다. 노동이 아닌 방법으로 세상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나만의 가치를 찾아내서 연마해야 한다. 세상에 적절히 쓰일 때까지 무던하게 기다리면서 다른 무엇에도 대체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싶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변치 않는 것들을 생각한다. 세상에서 오직 나만이 가진 것이 무엇일까 생각한다. 세상의 기준에서 나는 가진 것 없는 빈털터리지만 (심지어 빚도 없다) 남들보다 더 많이 가진 것은 분명히 있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생각, 나만이 할 수 있는 경험, 나만이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나는 남들보다 잡념이 많은 사람이고 간단한 깨달음조차도 한참을 뱅뱅 돌아서 생각하고 부딪히고 오랜 번민 후에 얻어내는 사람이다. 그런 점이 나의 허점이나 단점으로 여겨질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 여정이 곧 나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에 애틋하게 여겨진다. 그 속에 나의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애초에 누려본 경험이 없어서일까. 더 많은 돈을 벌고 모으고 불려서 소유하고 사는 삶 보다 덜 벌더라도 소유하지 않는 삶을 더 편하게 느낀다. 가진 돈이 없어도 소유를 덜어내는게 이렇게도 편한데, 가진 돈이 많다고 달라질까. 누구나 가질 수 있고 할 수 있는 것들은 내게 무의미하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내는 삶을 살고 싶다. 애처롭게도 내가 글을 사랑하는 이유 또한 돈 들이지 않고 세상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가장 큰 힘을 가진 것이 글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고민들이 밥 먹여주지 않는다고 하지만 어떤 방법으로 세상에 내놓는가에 따라 밥 먹여줄 수도 있다고 믿는다. 나와 같은 욕구를 가진 이들은 세상에 분명히 존재하고 그런 사람들과의 연대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최근의 나는 타인의 시선과 세상의 잣대에 나 자신을 올려두고 손가락질하느라 한껏 위축된 상태였다. 알량한 자존심 하나 버리지 못해서 주저하고 멈춰있는 내가 한심했다. 과거의 이뤄 놓은 성과를 이제 와서 인정해달라고 떼쓰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그 시간들을 보상해달라고 매달리면서 정작 현재의 시간을 놓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약간만 달라지더라도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이 무의미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하니 한발 물러나 다시 생각하게 된다. 나는 돌고 돌아 또 나만의 방식으로 깨달음을 얻고 그 깨달음이 자양분이 돼서 나를 채울 테니까 그런 고민들도 모두 사랑하기로 한다.
진심으로 모두가 만족스러운 인생을 살았으면 좋겠다.
함부로 남의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함부로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리지 않고
누구보다 자신에 대해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인생이 어떤 모습이더라도 그 책임은 ‘나’에게 있고
내 인생은 다른 누구도 아닌
스스로가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