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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 많은 말띠 Oct 25. 2021

엄마의 베스트 프렌드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90년대에는 동네 사람들이 동네에 사는 아이들을  같이 키웠다. 내가 기억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은 맞벌이였는데, 딱히 배를 곯아본 적은 없었다. 내가 3, 동생이 100 무렵에 우리 부모님은 구의동 판자촌을 떠나 처음으로  2개짜리 화장실과 부엌을 단독으로 사용할  있는 집에 정착했다. 부부의 신혼집이었던 구의동 집은 부엌과 화장실이 공용인 구식 가옥이었다. 나는 기억나지 않지만 엄마의 말에 따르면 단칸방  개가 ㄴ자로 붙어 있는 형태로, 말이 옆집 사는 사람이지 구조적으로는 '옆방' 사람이었으니 부부에게 생기는 모든 불화를 숨기려야 숨길 수가 없었다고 한다. 처음으로  다운 집을 마련해 정착한 곳은 시장통에 위치한 조그마한 건물 2층이었다. 1층에는 분식집과 유아용품점, 금은방이 있었고 맞은편에는 유리 가게가 있었다. 유리 가게 앞에서 미역이나 두부, 각종 채소를 늘어놓고 팔았는데 가끔 엄마가 "유리 가게에서 두부  모만  "라고 심부름을 시키면 '유리 가게에서 두부를  오라는 말은 우리 동네 사람이 아니면 다들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 하면서 묘한 소속감을 느끼곤 했다.




시장의 이름은 '장미원'. 한때는 장미 밭이었 곳에 시장이 들어섰다고 했다. 장미원 시장 때문에 (실제 지명은 수유동이었지만)  동네가  '장미원'으로 불렸다. 유치원이 파하고 나면 장미원 시장 입구에 노란 유치원 차에서 또래 아이들이 우르르 내렸다. 아이들은 곧장 집으로 가지 않고 시장의 모든 가게를 드나들며 놀이터처럼 놀았다. 나는 그중에서도 쌀가게에 기를 좋아했다. 쌀가게에는 뚱한 표정과 달리 살갑게 대해주는 노총각 삼촌과 빨간색 거대한 대야에 굵은소금이며 쌀이며  같은 것들이 수북하게 쌓여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굵은소금에 꽂힌 플라스틱 바가지를 뽑아 들고 촤르륵 촤르륵 소금을 담고 쏟기를 반복하다가 싫증이 나면  대야로 가서 쌀을 손에 가득 쥐었다가 던졌다가 모래놀이하듯 조물딱거렸다. 어른이  지금 생각하면 매일 찾아와서 상품을 망쳐 놓는 아이가 괘씸할 만도 한데 쌀가게 삼촌은 그런 이유로 다그친 적은  번도 없었다. 가끔은 끼니를 챙겨주기도 했다. 어느 가게를 가던 들어가서 인사를 하면 떡이나 과자나 믹스커피 같은 간식거리를 얻어먹을  있었다. 때로는 김밥을 주기도 하고, 먹고 있던 상에 밥그릇과 수저를 더하며 먹고 가라 하기도 했다.




하도 아이들이 이 가게 저 가게를 기웃거리니 온 동네 사람들이 누가 어디에 가고 뭘 했는지 다 알고 있었다. 이 시장통에서 우리 부모님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오래 정착했다. 8살이 되던 해에 장미원에서 멀지 않은 윗동네로 이사했지만 엄마는 장미원 시장 안에 아동복 가게를 열어 여전히 시장 사람들과 친척처럼 지냈다. 그도 그럴 것이 엄마를 공주님 대접해 주던 외할아버지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오빠처럼 챙겨주던 큰동생마저 당뇨로 일찍 세상을 떴으니 형제라고는 제 잘난 줄만 아는 막냇동생 하나에, 재가하여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모친이 전부였다. 엄마는 외할머니와 오래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아 거의 평생을 데면데면 지냈으니 친정의 온기를 장미원 시장 사람들에게 더 많이 느꼈을 것은 당연했다. 아빠가 속을 썩이면 동네 사람들이 나서서 "은지 엄마 고생 좀 그만 시켜" 하면서 편을 들어주곤 했으니까. 그 끈끈한 관계가 나중에는 괜한 참견과 오지랖, 살을 도려내는 상처로 돌아올지 그때는 몰랐을 것이었다. 사정을 많이 아는 사람일수록 상처 주기도 더 쉽다.




내가 어린이였을 때부터 청소년이 돼가는 시간 동안 부모님은 늘 사이가 좋지 않았다. '저렇게 싸울 거면 누구 하나 집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열 살이 갓 지났을 무렵부터 했던 것 같다. 한번 시작된 불화는 기세 좋은 불길처럼 번져갔고 모두가 잠든 새벽에 부모님이 싸우는 소리가 집 밖으로 새나가는 일도 다반사였다. 엄마와 목욕탕에 가면 사우나 안에서 아줌마들이 전날 시끄러웠던 집 이야기를 했다. 내가 '아줌마, 그 집이 우리 집이에요.' 속으로 생각하고 있으면 엄마는 말없이 자리를 떴다. 그런 날에는 어쩐지 평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목욕을 끝내는 것 같았다. 엄마의 표정을 살금살금 살피며 나도 더 빠르게 몸을 밀어댔다. 그런 날에는 바나나 우유 사달라는 말도 꺼낼 수가 없다는 게 더 속상했다. 철없게도.




당시 엄마는 중학생, 고등학생 딸 둘을 홀로 거둘 용기보다 아빠의 폭언과 폭력을 견딜 용기가 더 컸던 것 같다. 동네 창피해서 아동복 가게도 때려치운 마당에 커가는 딸들을 부양할 길은 막막하기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보기 흉한 혹처럼 아빠를, 가정불화를 오래도록 달고 다녔다. 저마다의 불행으로 버거운 삶에 친구의 불행은 똥물 같은 것이었을까. 혹여나 똥물이 튈까 두려웠던 엄마의 친구들은 엄마의 미련함을 핑계로 하나 둘 떠났다. 오랜 벗들을 모두 잃고 난 뒤에야 엄마는 혹을 떼어낼 수 있었다. 망망대해 위에 홀로 내쳐진 그 깊고 어두운 고독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다.




엄마의 보호를 받던 시절에는 엄마와 딱히 어디를 가서 즐거운 한때를 보냈던 기억이 별로 없다. 부유하거나 야무진 엄마의 친구들이 나서야지만 갈 수 있었던 공원이나, 궁, 전시회는 특별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엄마는 주로 젊은 날의 추억이 깃든 곳에 나와 동생을 데리고 다녔다. 지금은 사라진 단성사에도 여러 번 가서 영화 관람을 했다. 그때는 영화관이 지금처럼 많지 않아서 영화를 보려면 종로까지 나서야 하는 건 알았지만, 낡고 한적한 단성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몰랐다. 엄마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거기에 추억이 많아. 너희들 데리고 젊었을 때 추억이 있는 곳에 가면 감회가 남다르거든. 아빠랑 연애하던 생각도 많이 나고." 공교롭게도 동생과 나는 단성사의 추억을 꽤나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나지 않으면서 필름 모양의 조형물이나 벽면을 장식하고 있던 영화, 영화배우들의 사진들은 또렷하다. 엄마의 감정이 우리에게도 전달됐던 걸까.




엄마는 베스트 프렌드가 없다. 굳이 따지자면 두 딸이 베스트 프렌드지. 여기서 베스트 프렌드라 함은 단지 상징적인 명칭일 뿐 실제로 나는 '베스트'라고 할 수 없다. 다정하고 살갑지도 않고, 위로는커녕 현실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기 일쑤다. 관심 없는 이야기는 잘 듣지 못하는 데다가 가슴을 후벼파는 소리는 또 어찌나 따박따박 잘하는지. 그나마 자랑할 만한 것이라고는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뿐이다. 언젠가부터 주말이면 하루는 꼭 엄마랑 시간을 보내는 게 공식처럼 됐다. 계절 따라 풍경 좋은 곳이나 구경거리가 많은 도심으로 나선다. 평소에는 부정적인 말을 압도적으로 많이 하는 엄마가 외출을 하면 "좋아", "재밌어" 같은 긍정적인 말을 하는 게 좋다. 단지 그뿐이다. 엄마가 웃으면 나도 기분이 좋아진다. 즐거울 때 엄마는 누구보다 천진난만하고, 행복해 보인다. 엄마가 행복하다는 그 자체보다 엄마가 행복한 모습을 보면 내가 행복해지기 때문이라는 것이 조금 부끄럽지만 어쨌든 진실은 그렇다. 혼자 바람 쐬러 가려다가도 꼭 엄마 생각이 난다. 엄마가 갈 수 있는 곳이면 데려가야 속이 편하다. 내가 볼 책은 한 권 사는 것도 아까워서 동네 도서관 보유 목록을 뒤져대면서, 엄마 줄 책은 아낌없이 산다. 모르긴 몰라도 내가 성인이 된 후로 엄마는 나를 보호자로 생각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엄마가 아프면 당연히 내가 보호자가 됐다. 이렇게 빨리 엄마의 보호자 노릇을 하게 될 줄 알았다면 어렸을 때 더 어리광을 부릴걸, 엄마라는 언덕에 더 부벼대볼걸, 좋은데 데리고 가달라고 더 많이 엄마를 보챌 걸 후회가 막심하다.




엄마는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지만) 드라마광이다. 엄마의 인생에서 드라마를 빼면 그 많은 시간을 대체 뭐하고 보냈을까 싶을 정도로 아침에도 저녁에도 드라마 삼매경이다. 세상 일에는 그렇게 골치 아프다고 치를 떨면서 더 머리 아픈 막장 드라마를 잘도 본다. "아유 짜증나. 저 미친년. 찢어 죽일 놈. 드라마를 왜 이렇게 써?"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렇게 욕할 거면 보지 말라고 화냈더니 이제는 방에 들어가서 본다. 엄마 방에서는 저녁이면 깔깔 웃어대는 소리와, 혀를 차는 소리, 욕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녀의 공간에서만큼은 하고 싶은 대로 두기로 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을 때는 나도 방에 들어와서 음악을 켜고 볼륨을 높인다.




엄마는 가족끼리 모인 외식 자리에서도 스마트폰으로 드라마를 본다. 며칠 전 동생과 나, 엄마 셋이서 외식을 하러 갔을 때도 한창 주말극이 방송 중이었기 때문에 혼자서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엄마의 접시 위에 잘 익은 삼겹살과 마늘을 보급했다. 접시 위에 놓인 음식을 집어먹으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 떼는 엄마를 보고 있자니 내 친구의 세 살 난 딸의 모습이 겹친다. 아직 말도 잘 못하는 그 어린아이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화면을 휙휙 밀면서 유튜브를 시청한다. 작은 숟가락에 밥을 퍼서 입 앞에 가져가면 허공에서 몇 번 헛질을 하다가 겨우 숟가락을 입에 넣는다. 오물오물 밥을 씹으면서도 스마트폰에서 눈을 못 떼던 볼살 통통한 그 아이의 모습이 엄마를 보며 떠오르다니. "엄마, 엄마 지금 내 친구 딸내미 같아. 내 친구들은 자식 키우느라 밥을 못 먹고, 나는 우리 엄마 모시느라 밥을 못 먹네?" 하는 나의 생색에도 들은 체 만 체다.





엄마가 나의 보호자였을 때






엄마가 나의 보호자였을 때 2




엄마는 사치스러운 사람은 아니지만 검소한 사람도 아니다. 명품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금을 좋아하고, 비싼 옷은 안 사도 5천 원짜리 티셔츠는 쉽게 산다. 물건을 살 때 싼 것을 찾지만 정말 필요한지, 어떻게 쓸지, 얼마나 사용할 수 있는지 따위의 합리적인 생각은 잘 안 한다. 쓰던 물건이 조금 맘에 안 들면 금세 새것을 사다 바꾸고, 가족들이 찾는 것은 비싸도 바로 사다 준다. 나는 그런 엄마가 싫다. 혼자 밥 먹을 때 선 채로 대충 때우는 것도 싫고, 피부과에 점 빼러 가는 돈이 아까워서 빙초산을 발라 바늘로 쑤셔대는 것도 싫다. 엄마 스스로가 엄마를 소중히 여기고 아껴줬으면 한다. 그런 이야기를 10년쯤 했더니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매니큐어를 사대는 대신 네일숍에 가고, 믹스 커피 대신 카페라테를 즐긴다. 나는 이 변화가 너무 반가웠지만 엄마는 주말에 카페에 같이 가면 한 모금도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한 컵을 다 비우면서 "입맛만 높아져서 큰일이야" 한다. 왜 걱정을 사서 할까? 커피가 맛있으면 맛있다고 하고 말 일이지. 3개월마다 한 번씩 10만 원이나 되는 돈을 손톱을 치장하는데 들이는 게 영 마음에 걸리는지 예쁘게 칠하고 온 날 저녁에는 "이것도 이제 못할 거 같아. 너무 비싸서 계속할 수 있겠어?" 한다. 듣다 못한 나는 "엄마, 네일숍 안 가면 또 허구한 날 매니큐어 사다가 쌓아 놓을 거잖아. 바르고 말리고 하는 데 시간 걸리고.. 그 돈이 그 돈이야. 엄마가 다른 아줌마들처럼 계모임을 해? 등산복을 사? 비싼 파마를 해? 엄마 몸에 돈 쓰는 거 그거 하나인데 그냥 즐겨. 한 달에 3만 원 돈인데 그 정도는 투자할 수 있잖아. 대신 최고로 만족해. 돈 쓰면서 찝찝해하지 말고." 그런 엄마에게 또 구박을 한다. 차라리 니가 결제를 해주던지, 이것아. 성인이 된 후로는 주로 잔소리를 듣기 보다 잔소리를 하는 편이다 보니 엄마가 적잖이 가스라이팅 당한 듯하다. 뭐든 내가 얘기하면 믿고, 정말 그런가 보다 한다. 이러면 안 되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엄마가 작아 보일 때가 많다.




30~40대 시절의 엄마는 무서운 사람이었다. 화가 나있을 때가 많았고, 때리기도 무진장 때렸다. 세상에 초등학생 딸한테 집안일 시키는 것도 모자라서 청소가 맘에 안 든다고 걸레로 때리고 빨래 안 해놨다고 옷걸이로 때리는 엄마가 어딨나. 공부 못하는 걸로는 안 때린 게 다행이지 뭐야. 엄마는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나는 장녀로서 늘 엄마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게 습관이 돼서 지금도 엄마의 감정이 내게 그대로 전이되는 것을 자주 느낀다. 그 감정의 99%는 부정적 감정이라 문제다. 이 나이에 독립도 못하고 옆에 붙어살아서 그런지 점점 더 그렇게 된다. 갖은 고생을 하면서 붙어 지냈으니 정서적 유대가 깊은 탓이다. 내가 딸이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곤 한다. 내가 딸로 태어나서 엄마는 이득이고, 나는 손해야. 그런 생각을 자주 하기 때문에 엄마를 데리고 다니면서도 꼭 생색을 낸다. "딸이 최고지? 봐봐. 주변에 부모님 모시고 온 사람들 다 딸밖에 없잖아. 엄마는 딸 둘 낳은 거 엄마 인생의 최대 행운인 거야." 내 친구 고구마는 이 얘기를 듣고 "독하다 독해. 그거 가스라이팅이다. 꼭 그렇게 생색을 내노. 작작해라." 했다.




엄마는 예민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다. 불편하거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곧장 말을 한다. 다른 사람의 배려는 당연하게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조금이라도 피해를 주면 득달같이 욕을 한다. 인간의 뇌가 나이가 들면서 퇴화되면 이런 성향이 점점 강해진다고 하는데, 엄마는 본래 예민한 성격과 노화 증상이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을 진행 중인 듯하다. 엄마와 함께 다니면 모든 것에 신경을 써야 한다. 운전을 못하는 나는 대중교통으로 한 번에 갈 수 있고(이왕이면 버스) 정류장이나 역에서 10분 이상 걷지 않는 곳을 위주로 찾는다. 음식점을 가더라도 메인 메뉴보다 반찬이 성의 있게 깔리는지가 더 중요하다. 더우면 부채질해주고, 추우면 옷 벗어주는 식으로 고생은 내가 하고 엄마의 안위를 챙긴다. 엄마가 짜증 내거나 불편해하지 않는 게 곧 나의 즐거움이니까 최대한 만족스럽게 동선을 짜지만 100% 성공한 적은 거의 없다. 혼자 다니거나 또래 친구와 다니는 것보다 배로 아니, 곱절로 에너지를 쓰다 보니 지쳐서 나도 같이 예민해지는 난감한 상황도 벌어진다. 그러면 동생은 중간에서 돌아버릴 지경이 된다.




아직 환갑도 되지 않은 나이에 몸이 약해진 엄마와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든다. 그 생각만 하면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돌아와서 후회하면서도 늘 엄마랑 같이 나선다. 내가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고 나를 절대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이지만 엄마가 최대한 느리게 늙었으면 좋겠다. 영화 <니나내나>에서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모시는 딸이 그런 말을 한다. 아버지가 정신 놓고 사는 게 더 나을 때도 있다고. 잠깐 정신 돌아오면 꼭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게 더 미칠 노릇이라고. 그 말이 무섭게 들렸다. 나는 아직 엄마가 너무 빨리 어린아이가 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 엄마에 대해서 많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모성애에 대한 애틋함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다.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은혜에 대한 감사보다 훨씬 많은 종류의 깊고 넓은 감정이 존재한다. 그것들을 어떻게 표현할지 엄두가 안 나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까 두려운 마음에 엄마에 대한 글을 쓰지 못했었다. 몇 번이고 시도했으나 늘 실패했다. 때로는 너무 장황하고, 때로는 푸념 같고, 때로는 쓰레기 같았다. 오늘은 그냥, 엄마의 삶과 나의 삶이 겹치는 그 시간들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고 싶어서.





마포대교에서



낙산공원에서



우이천에서



강원도에서



용문사에서



성북천에서



아차산에서




서울숲에서





남산에서




북악 팔각정에서




부산에서



북서울 꿈의 숲에서


오락실에서


동네에서





엄마는 맘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꼭

"나 사진 찍어줘" 한다.

재밌는 것은 한 번도 그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 적은 없다.


보지도 않을 거면서 왜 찍어달라는 거야?


엄마는 내가 엄마를 찍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내 사진첩에 담기고 싶었던 걸까.

그도 아니면

사진 속에서만큼이라도

마음껏 주인공이 되고 싶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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