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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ha Jan 23. 2021

결국 보내고야 말았다. <내 인생 첫 퇴사 메일>

수많은 메일을 보냈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제목은 처음 써본다.


"자, 받아"


나의 결혼식 전 날, 그 복잡한 고속터미널 꽃시장을 찾아 손수 부케를 만들어주었던 인애는 퇴사 날까지도 나에게 꽃을 선사했다. 축하한다는 말과 함께.


축하한다는 말을 들어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으나, 꽃을 받으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은 확실하구나 싶었다. 마음 맞는 친구가 회사 옆 건물에 다니는 건 정말 좋은 일이다. 우리는 가끔 점심을 함께하기도 했고, 퇴근 후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앞으로 그런 날은 없을 것이라는 게 어쩐지 조금 슬펐다.


퇴사하는 날까지 꽃을 들고 회사에 찾아와 준 친구가 있어 뭉클했다.







퇴사는 이번 생에 처음인걸요


퇴사하는 날이 이렇게 바쁠 것이라고 왜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을까? 그럭저럭 시간만 채우다가 오는 줄 알았는데 왠 걸, 퇴근시간을 넘어 퇴근을 하다니.


일단 인사.

예로부터 우리나라는 동방예의지국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선조들로부터 받은 그 DNA를 끌어 올 때가 온 것이다. 인사를 안 하고 마이웨이로 나갔다가는 그 친구 예의 없네, 이럴 줄 몰랐다네,  나한테 말도 없이 퇴사했다고? 할까 싶어서 한 분 한 분 꼭 인사는 드려야지 싶었다.


꽤 오랫동안 일을 하며 친하게 지낸 동료들이 많았고, 꼭 친분이 없더라도 협업을 한 담당자도 많았다. 혹시라도 일하면서 쌓인 무언가가 있다면 마지막 인사를 통해 앙금을 날리고 싶은 맘도 있었다. "뭐 마지막인데 못할 것도 없지!"라고 생각한 것이 큰 오산이었다. 이건 뭐 결혼식 청첩장 돌릴 때보다 어려운 수준이라니...


상무님은 왜 찾아갈 때마다 자리에 없는 건지? 그 과장님은 회의 중이라고? 그 팀장님은 외근 나가셨다고?

자리에 갈 때마다 번번이 실패하니 이번엔 미리 사내 메신저로 묻는다. 잠깐 자리로 가도 될까요? 에 대한 대답은 '지금 회의 가야 해서 바쁘니 내일 얘기하자' 란다.

아... 저 내일은 없어요.


게다가 사무실은 총 다섯 개 층을 사용했고, 한 층은 아예 다른 동이다 보니 엘리베이터 기다리느라 종일 시간을 허비했다. '저 이렇게 예의 바르게 마지막 인사드리고 갑니다' 하는 게 이렇게 어렵다니. 회의도 많고 외근도 많은 치열한 이 곳에서 하루 만에 인사를 하려고 한 게 욕심이었다는 걸, 안타깝게도 퇴사하는 날 알게 되었다. 혹시 내 인생에 두 번째 퇴사가 있다면 이 글을 꺼내 읽어보고 참고해야지 휴.



인사를 다 드리지 못하고 찝찝한 마음으로 자리에 돌아온다. 컴퓨터를 반납하기 전 마지막으로 내가 놓친 것은 없는지 체크해본다. 이 컴퓨터야말로 나의 20대와 30대를 고스란히 담아놓은 모든 기록의 산물이었다.


마케팅 플랜을 짜던 엑셀 파일, 머리 터지게 제안서 쓰던 PPT 파일, 업체와 계약서 쓰던 한글 파일, 그리고 머리가 복잡할 때 눈치껏 하던 온라인 쇼핑, 매년 해도 매년 헷갈리는 연말정산까지도 함께한 녀석이다. 그렇게 모든 것을 담았던 곳이지만 유효기간 만료는 칼같이 다가왔다. 이제는 의미 없는 파일을 드래그하여 휴지통으로 보내며 생각한다.

이제 너도 바탕화면 정리 잘 못하는 머리 아픈 주인 말고, 깔끔한 새 주인에게 가거라-



늘 채우기는 쉬워도 비우는 것은 어렵다










결국 보내고야 말았다. <내 인생 첫 퇴사 메일>


그리곤 마지막 통과의례라고 할 수 있는 퇴사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직장 생활을 하며 수도 없이 메일을 보냈지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제목의 메일은 처음 써본다.


오늘 결국 인사를 드리지 못한 분들에게도 마음이 닿길 바라며. 한 줄 한 줄 써나간 메일을 마지막으로 마침내 컴퓨터를 반납했다.





생 첫 퇴사 메일

[퇴사 인사]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안녕하세요 서지혜입니다.

수신하시는 분에게는 보통의 목요일 이겠지만 저에게는 출근길부터 묘했던 마지막 출근일 입니다. 늘 받아보기만 하던 퇴사 메일을 직접 쓰려고 하니 만감이 교차합니다. 늘 가시는 분들께 어딜 가든 행복하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곤 했는데, 막상 제가 듣는다고 하니 괜히 마음이 찌르르하네요. 


26살에 발디딘 첫 회사에 34살까지 있을 줄이야, 약 8년이란 시간을 채운 이곳은 저에게는 회사 이상의 존재였던 것 같아요. 첫 직장이라 사회생활의 기준이 되었던 이곳에서 치열하게 일했고, 잘해보고 싶었습니다. 친구들도 저처럼 회사 욕 안 하고 다니는 애는 처음 본다고 할 정도로 애착이 있던 곳이기도 하지요. 


생각보다 익숙한 곳을 떠난다는 것은 엄청난 용기와 결심을 필요로 했습니다. 아마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용기가 아닐까 싶어요. 익숙한 것들과의 이별은 참 어렵습니다. 함께 했던 동료들, 매일 다니던 출근길, 지독한 월요병... 하다못해 지하 편의점까지도 생각이 날 것 같으니까요.


떠나는 마당이지만 감사한 것을 적어보자면, 이 곳에 있던 모든 순간이 쌓여 저의 가장 큰 자산이 되었습니다. 뭐랄까요, 실패해도 될 만큼 더 자신감이 생긴 것 같습니다. 함께 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아쉽지만, 그 자신감을 안고 어딘가에서 씩씩하게 살고 있을 테니 작게나마 응원해주세요.

 

마지막으로 같은 목표를 가지고 함께 하는 동료들이 있어 힘이 되었습니다. 함께 일했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리며, 회사는 떠나지만 어디선가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기대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Best regards




진짜 끝이다 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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