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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May 26. 2024

가난의 역사 Part.1

나는 왜 내가 가난하다고 생각할까? 사실상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나만큼 벌고 나만큼 쓴다. 내가 유난히 못 벌거나 못 먹고살지도 않는데 가난 발작 버튼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지금은 이 글을 써 내려갈 만큼 이것을 이야기하기 편해졌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다. 아직 나의 가난 발작버튼에 대해 정리된 부분은 없다. 그래서 의식의 흐름대로 가난의 역사를 써 내가 보려 한다. 






학생 시절의 시간제 아르바이트 빼고 나의 직장은 뮤지컬컴퍼니였다. 뮤지컬이 좋아서 가방 하나 싸들고 무작정 대학로로 향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위치가 적당한 찜질방 입장권을 서른 끊어서 찜질방에서 출퇴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다. 왜냐하면 당시 내가 살던 곳은 경기도 안산이었고 4호선을 타고 가면 되는 곳이었다. 그런데 스무 살의 나는 정말 비장한 마음으로 대학로에 입성(?)했다. 운이 좋게 금방 뮤지컬 컴퍼니에서 일자리를 구했다. 기억으론 60만 원을 받으며 일했던 같다. 그런데도 행복했다. 같은 꿈을 꾸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날들이 좋았다. 60만 원의 수익이 생기자 나는 찜질방에서 20만 원 고시원으로 이사를 갔다. 싱글베드와 그 정도 사이즈의 여유공간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작은 방은 나의 천국이었다. 내가 필요한 모든 것이 있었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빨래 줄, 밥을 먹거나 책을 읽을 있는 책상, 최애 뮤지컬을 있는 PMP까지, 정말 아늑한 나의 쉼터였다. 퇴근 길거리에서 염통꼬치 하나를 사서 고시원 계단에서 먹었는데 시간이 그렇게 행복했다. 그랬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부자였다. 


이후에도 나는 쭉 프리랜서로 지냈다. 월급을 받으며 일한 적도 있지만 프로젝트 계약이었기 때문에 사실상은 항상 프리랜서였다. 사실 3년 전에 큰 맘먹고 취직한 적이 있는데 내가 아니라 회사 사람들이 나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2개월을 못 채우고 권고사직 당했다. 사실 난 매일 디즈니랜드 가는 것처럼 만원 버스 타는 것부터 줄 서서 먹는 점심까지 회사 생활의 모든 순간이 행복했었다. 아무튼 나의 첫 직장이 그랬던 것처럼 나는 돈이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슨 일을 할 때 재미가 있는지, 가슴이 뛰는지가 먼저였다. 그랬기에 금액이 중요한 적은 없었다. 


작살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살던 호주에서 1년 반, 해녀학교를 다니기 위해 간 제주도에서 1년, 그렇게 짧고 길게 여행을 다니며 수년.... 아 처음 가난했던 순간이 기억났다. 프랑스였다. 왜 갔는지 모르겠는 프랑스에서였다. 당시 나는 제주도에서 잘 지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마살 제대로 끼어있던 당시 나에게 1년 이상 한 곳에 머무르는 것이 힘들었고, 다음엔 어디를 갈까 고민을 하다가 여행하다 만난 친구들의 다수가 프랑스 사람들이어서 그냥 프랑스로 정했다. 별다른 이유도 없었고 별다른 계획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파리 공항에 도착했을 때부터 잘 안 풀렸다. 저녁 시간에 공항에 도착은 했는데 당일 묵을 숙소도 정한 것이 없고 당장 공항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정한 것이 없었다. 심카드도 없었고 휴대폰은 먹통이었다. 제주도에 갈 때도 종량제 쓰레기봉투에 대충 짐을 챙겨 무작정 가서 잘 먹고 잘 살았기에 프랑스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다. 사람들에게 나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는 내 상황을 전달하면 당연히 사람들이 도와줄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고'라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지나갔고 도심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거나 숙소를 추천해 주는 등의 호의는 베풀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늦은 밤 도착한 파리의 도심에는 마리화나 냄새로 가득했고 캐리어를 끌고 가는 소리에 골목의 사람들이 나를 주목했다. 무서워서 일단 아무 숙소나 들어가 체크인을 했다. 당시 나의 전재산은 유로로 환전한 60만 원이 전부였고 그 돈은 파리에서 묵는 2주 만에 다 써버렸다. 어디에서든 어떤 상황에서든 방법을 잘 찾아 살아왔기에 금방 일을 구하고 잘 살 수 있을 줄 알았다. 아, 참고로 나는 불어를 단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마 나의 가난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한 것 같다. 나는 이후 일을 구하지 못해 바닷가에서 주워 온 조개껍질로 만든 액세서리를 주말 시장에 나가 팔아 보았지만 단 한 개도 못 팔았고 결국 비싼 프랑스 물가를 못 이기고 스페인으로 도망을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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