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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Jun 02. 2024

가난의 역사 Part.2

나의 가난의 역사는 프랑스에서 시작된다. 


(가난의 역사 Part.1) 

https://brunch.co.kr/@kiharyworld/126





지금 생각하면 프랑스는 풍수지리학적으로 나랑 잘 안 맞는 나라인가 싶을 정도로 파리에 도착한 이후 모든 일이 잘 안 풀렸다. 일단 날씨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파리를 도착한 내내 비가 오거나 흐렸다. 서귀포에서 매일 바다수영을 하며 지내던 나로서는 답답한 도시의 칙칙한 날씨에 숨이 턱 막혔다. 그리고 나에게 파리는 외로운 도시였다. 어느 나라에서도 여행지에 도착한 순간 마음 맞는 친구를 찰떡같이 찾아서 외로울 틈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파리에서는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것도 어려웠다. 길을 걷던 중 마주치는 것 문이 닫힌 눈빛들이었고 사람들과 대화를 트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파리에 왔으니 매일 열심히 돌아다니기는 한 것 같은데 60만 원이 전 재산이라 그 유명한 박물관이나 미술관들은 가볼 생각도 못 했다. 아껴 쓴다고 아껴 썼지만 생각보다 비싼 물가 때문에 전재산 60만 원은 2주 만에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단 파리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은 확실했다. 마지막 잔고로 기차표를 끊기로 했다. 무엇보다 해가 보고 싶었기에 프랑스에서 갈 수 있는 가장 남쪽으로 떠나기로 했다. 


모든 건물이 양기 가득한 빨간 벽돌로 지어진 나를 위한 도시 툴루즈에 도착했다. 날씨가 좋아서 일단 합격이었다. 하지만 돈이 떨어졌기 때문에 숙소를 구할 돈은 없었다. 가는 길에 카우치 서핑을 통해 운이 좋게 잘 수 있는 곳을 찾았다. 호스트는 일주일정도 머물러도 좋다고 했다. 툴루즈는 시작부터 좋았다. 호스트와 인사를 한 후 그날 밤 6명의 친구들이 모여 사는 집에 초대를 받아 다 함께 저녁을 먹으며 노래를 부르고 밤을 보냈다. 이 친구들은 나를 가족처럼 받아주었다. 함께 점심도 먹고 정원에서 수영도 하며 즐거운 생활을 이어나갔다. 


문제는 일이 구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이력서를 메일로 보내기도 하고 프린트해 직접 돌리러 다니기도 했지만 답이 없었다. 프랑스에는 나보다 프랑스어를 훨씬 잘하는 유럽인들이 많았고 그들의 입장에서는 불어 하나 못하는 나를 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툴루즈에서부터 비상용으로 가져온 신용카드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지출이라고는 슈퍼마켓에서 장을 보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장을 보기 위해 일요일마다 열리는 마을 장에 나갔다가 새로운 출구를 보았다. 사람들이 자신이 쓴 책, 액세서리, 인형들을 펼쳐놓고 파는 것이었다. 나에게 그런 손재주는 없었다. 사업자금으로 투자할 돈도 없었다. 최소의 투자로 이익을 낼 수 있는 게 뭘지 고민했다. 친구들과 가끔 놀러 가는 바닷가가 생각났다. 조개들을 주워서 액세서리를 만들어야겠다. 


액세서리 재료가게에 가서 보따리에 싸맨 조개들을 펼쳐놓고 무작정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아니 프랑스는 무슨 이런 재료도 이렇게 비싼지. 액세서리처럼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재료들만 샀다. 결과물은 처참했다. 내가 봐도 예쁘진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좋아하겠지. 아니, 불쌍해서라도 사줄 수도 있어. 그때부터 일요일마다 장에 나가 액세서리를 펼쳐 놓고 앉아있었다. 차마 팔았다고는 표현하지 못하겠다. 결국 하나도 못 팔았기 때문에. 그래도 하나의 위안은 항상 내 옆 자리에서 책을 팔고 있던 청년의 책도 하나도 안 팔렸다는 것이었다. 이 친구는 자신이 직접 쓴 'Papillon(나비)'이라는 짧은 소설을 팔고 있었다. 나라도 하나 사주고 싶었지만 어차피 사도 읽지도 못할 것이라 서로 사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 친구와 수다 떠는 주말이 나쁘지는 않았다.



이런 생활이 한 달 즈음되어가자 마음적으로 지치기 시작했다. 점점 주는 예산에 먹는 것도 시원치 않았다. 그래도 오늘도 살아남은 나 자신에게 매일 선물 하나는 빠트리지 않고 줬다. 바닐라 푸딩이었다. 슈퍼에서 4팩 세트로 살 수 있는 푸딩이었는데 정확한 가격은 기억이 안 나지만 이 푸딩 하나가 나의 하루에 가장 큰 투자였다. 나는 이 푸딩을 어디에서 어느 시간 대에 먹어야 가장 맛있게 먹을 수 있을지 매일 고민했다. 거의 매일 해 질 녘 가론강에서 노을을 보며 먹는 것을 선택했다. 이 시간대면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가족 친구들과 모여 시끌벅적한 사람들 사이 홀로 바닐라 푸딩을 입 안에서 녹여 먹고 있는 나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지던 날이었다. 

 

'나는 왜 프랑스에 온 걸까? 왜 행복했던 제주도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또 떠나온 걸까?'


어느 답도 내리지 못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돌아가는 중 모여든 사람들이 보였다. 서커스 버스킹이었다. 내 시선은 퍼포먼스보다 모여드는 동전들에 쏠렸다, '나도 저런 재능이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내가 동전을 너무 뚫어지게 쳐다본 건지 퍼포머가 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세요. 한국 사람이에요?" 


한국말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한국말이라 안 그래도 반가운데 그 한국말이 대머리 서커스 퍼포머에게서 나오니 더 놀랐다. 


"헐? 한국말할 줄 알아요?"


그는 공연 때문에 한국에서 잠깐 머문 적이 있다고 했다. 그때 배운 몇 마디가 아주 그럴듯했다. 우리는 도시를 걸으며 잠시 대화를 나눴다. 그는 원래 스페인 사람인데 현재는 툴루즈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밴드 공연과 서커스 공연을 위해 스페인에 갈 예정이라고 했다. 


"그런데 드러머가 없어."


 그는 뜬금없이 나에게 드러머를 제안했다. 나는 대단한 박치이다. 나는 손을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가르쳐 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드러머로 함께 하면 숙식제공을 해주겠다고 했다. 이 네 글자가 나를 설레게 했다. 숙식제공. 프랑스에서 나의 첫 직장이 밴드의 드러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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