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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백수 김한량 May 18. 2024

쇼핑의 역사

1화

이번에 내가 꽂힌 건 부츠였다. 동생의 사진 앨범을 보다가 부츠 착장을 보았는데 그게 너무 예뻐 보였다. 사실 부츠는 꽤 오래전부터 나의 마음에 들어와 있었다. 잉여시간에 쇼핑몰에서 부츠를 구경하거나 길을 가다가 예쁜 부츠를 보면 신어보곤 했는데 도저히 어떻게 신어야 할지 모르겠고 그다지 신고 다닐 일도 없을 것 같았다. 인터넷으로 ‘부츠 착장‘을 검색해 보면 예쁜 연예인들이 스타일리시하게 입은 모습을 나오는데 나에게는 그렇게 예쁘게 소화할 신체와 정성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동생의 사진이 내 욕망에 불을 지핀 것이다.


나도 꼭 저 착장으로 입어 보고 싶다.


나는 이후로 집에서 부츠를 검색하는데 혈안이 되었다. 휴대폰을 몇 시간씩 붙잡고 새로 알게 되는 부츠의 종류들을 하나하나씩 검색하며 나의 취향을 좁혀 나갔다.

발목까지 길이의 앵클부츠, 종아리까지 오는 반 부츠, 무릎 아래까지 길이의 롱부츠, 무릎을 덮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하이 부츠 등 길이로서의 분류. 스타일을 분류하는 라이더 부츠, 카우보이 부츠, 첼시 부츠, 어그부츠 등등. 힐의 스타일까지 고려하다 보니 꽤 많은 시간을 여기에 소요했다.


당장 필요한 것도 아닌데 침대에 누워 감기는 눈을 억지로 떠가며 열심히인 내 모습에 현타가 왔다. 수많은 부츠 월드컵 라운드를 통해 두 부츠가 남게 되었다. 결제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시지가 떠올랐다.


한도 부족 승인 거절. 카드사 확인 요망


마지막 남은 두 부츠 중 하나를 남기는 데에 또 몇 시간이 흘렀다. 비슷한 부츠의 착장샷을 여러 개를 보며 나의 일상과 보유한 옷들과의 매칭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그리고 어렵게 하나를 선택했다. 다시 결제 버튼을 눌렀다.


한도 부족 승인 거절. 카드사 확인 요망


내 통장에는 4만 원이 안 되는 돈이 없었고 카드 한도도 없다는 현실에 비참했다. 그래. 내가 부츠나 살 때가 아니지. 휴대폰 화면을 끄고 눈을 감았다. 부츠를 신고 예뻐지고 행복했을 미래의 모습들이 더 선명해졌다. 쉽게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던 중 하나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고정지출금이 빠져나가는 통장에 있을 잔액이었다. 손을 대지 말아야 할 돈이었다. 그러나 이미 지펴진 부츠 불꽃은 이미 손 잡을 수 없이 타오르고 있었고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부추를 주문했다. 왠지 마음은 편해졌고 금방 잠에 들 수 있었다.



쇼핑의 역사


스무 살이었다. 스스로 ‘히키코모리 시절‘이라고 부르는 기간이었다.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종일 극영화나 다큐만 봤다.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보고 친구를 만나고 이별을 하며 울고 웃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편의 영화에 매료되었다. 지금은 제목이 기억나지 않는다. 도시락에는 예쁜 젤리나 과자 같은 것만 넣어 다니고 옷은 예쁜 공주 옷만 입는 소녀가 주인공이었다. 영화엔 판타지적인 요소가 많았는데 당시 나에겐 그 소녀가 사는 세상이 참 아름다워 보였나 보다. 그날부터 예쁜 젤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예쁜 유리병에 분류해서 담아 놓고 젤리를 바라보며 행복해하다 하나씩 꺼내 영화 속 주인공처럼 먹어내는 것 하루 일과 중 하나가 되었다.


차에 대한 아름다운 철학을 이야기하는 영화를 본 후엔 차를 종류 별로 세팅해 두고 마치 영화 속 주인공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생각했다. 2012년 지구종말설 다큐를 본 후엔 진짜 지구가 멸망할 것이라 믿고(그 다큐를 본 건 2009년이었고 나에게는 3년도 안 되는 시간만 있었다.) 가장 애정하는 애니메이션인 ‘원피스’의 주인공처럼 해적왕이 되고 싶다는 생각에 난생처음으로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물론 원피스가 없다는 건 알지만 나도 자유롭게 바다를 항해하고 싶었다.)


이후에도 내가 사는 세상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영화 속 한 세상을 찾았고 그 세상에 들어가기 위한 골든카드로서 모니터 속 아이템에 집착해 왔던 것 같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그 가짓 수와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생산적이든 그 반대이든 쇼핑은 나를 행동하게 했다. 부츠를 예쁘게 소화하기 위해서는 거울 앞에서 여러 옷을 입어봐야 하고 부츠를 신기 위해서는 밖으로 나갈 일을 만들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의 내가 되었다. 가난뱅이 영화 제작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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