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결정을 내리며 살아간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먹을 것인가? 입을 것인가? 살 것인가? 말 것인가? 등등.....
그런데 이 결정들은 각각의 경중(輕重)이 있다. 상대적으로 가벼운 결정들은 부담이 없다. 즉흥적이고 변덕스러워도 용인의 폭이 넓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들은 이야기가 다르다. 결정에 대한 책임과 희생이 따라오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할 수밖에 없다.
그럼 신중하다는 것은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
시간을 들여 오래 생각하고 오래 고민하며, 선택에 대한 다양한 반작용까지 모두 검토한 후에 결정하는 것은 신중하다는 것에 부합할까? 이론상은 그렇다. 그렇다면 어떤 결정이 있기까지 수반된 시간이 길면 길수록 좀 더 신중한 결정이 되는 걸까? 어느 정도는 수긍이 되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생각을 오래 한다고 질 좋은 결정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최근에 와서는 오히려 고민의 시간보다 차라리 좀 더 많은 자료와 정보수집이 신중한 결정에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안절부절 잡생각에 둘러싸여 있기보다 차라리 자료와 정보수집에 부지런을 떠는 것이 더욱 현명하며, 일정 부분 정보가 모이기 시작하면 결정은 저절로 내려진다는 주의이다. 결과적으로 마음속 결정은 의외로 신속하게 이루어지는데 오히려 그 결정에 대한 파급력이 염려되어 그 확신을 유지해 나가는 것에 훨씬 더 많은, 그리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쏟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그것을 결정에 대한 고민으로 오랫동안 착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우리가 신중하게 찾는 것은 일종의 합리성이지만 아시다시피 우리는 언제나 합리적인 결정만 내리는 것은 아니다. 특히 조직 내 결정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모아진 자료와 정보를 바탕으로 숙고의 과정을 거쳤다면 의외로 결정 그 자체에는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지 않는다. 하지만 조직 내 결정에 있어서 애석한 점은 그러한 결정의 합리성에도 불구하고 보고 단계에서 그 결정의 논리와 당위성이 무뎌진다는데 있다. 왜냐하면 직급 체계의 의사결정에는 합리성외에도 각 결재자의 리더십의 위치나 사업적 주관 등에 따라 관점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정의 갭(gap)은 특히 '한다' , '안 한다'의 결정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어떤 사업을 '한다'는 결정에는 필연적으로 결과적 검증이 수반된다. 사업을 하기로 했으니 미래의 어느 시점에 그 사업의 성공 여부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안 한다'의 결정에는 검증이 없다. 사업을 하지 않기로 했으니 그 사업이 될 사업이었는지 아니었는지는 영원히 알 수 없다. 이런 경우 애초 이 사업을 찬성한 측에서는 '안 한다'의 결정자에 대해 영원한 비판자로서의 자격을 보장받는다. 99%의 확률로 사업이 안 될 가능성이 높았더라도 - 필요한 경우에는 언제라도 - 남은 1%의 확률 때문에 될 수 있는 사업이었다는 주장을 서슴지 않는다. 이때 필요한 경우는 상호 경쟁의 중요한 포인트의 모든 지점이 다 해당된다. 승진심사, 근무성적평정 등의 객관적 평가에서부터 사사로운 인물평 등의 모든 뒷담화도 다 아우른다. 따라서 우리는 '한다'보다 '안 한다'의 결정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세상은 대개 일의 도모, 즉 '한다'의 결정을 취하는 사람을 더 후하게 평가한다.
애초에 조직이라는 게 무언가 일을 도모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숙명적 구성체라는 점에서 일을 기획하고 추진하려는 사람을 더 선호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일반 사기업에서는 이 논리가 통용될지라도 공공영역에 대한 나의 생각은 다르다. 공공영역에서는 '할 수 있는 행위'와 '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비교적 명확한 잣대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일의 도모적 성격의 사람이 이 '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할 수 있다'는 이른바 기업가적 프런티어 정신을 발휘한다면 위에서 말한 저 고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할 수 없는 행위'는 즉각 극복해야 할 대상, 또는 개척·개선해야 할 사항으로 치환되고, 여전히 '할 수 없는 행위'라고 의견을 내는 담당자는 그 즉시 복지부동의 전형적인 괴물이 된다. 이때 자기 주관을 밀고 나갈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무리 오래 고민한 내용이라도 소신을 꺾는 데는 채 5분이 걸리지 않는다.
사실 이런 경우는 너무 흔해서 따로 설명을 보탤 필요가 없을 정도다. 민원인 입장에서는 사업을 바라보는 디폴트 값이 애초 다르니 담당 공무원을 설득하는 게 여간 답답한 게 아니다. 거의 미칠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많이 들어봤다. 단체장 입장에서도 부정적 시각을 지닌 부하와 일하는 것은 매우 피곤하다. 야심차게 치적으로 내세울 사업 하나를 발굴했는데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사람에게 일을 맡길 이유가 없다. 이렇듯 네거티브(negative)한 사람은 어디서건 환영받을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가급적이면 너무 깊은 고민은 지양하라고 나 자신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조언하고 싶다. 왜냐하면 우리의 고민은 대부분 결정에 대한 고민이 아니라 실상 그 결정에 대한 불확실성의 두려움, 그리고 거기서 기인한 자기 번뇌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공공영역에 파지티브(positive)한 사람으로만 채워 넣어서 환상적인 공공서비스 개혁이 일어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모두 '내 일'을 보러 관공서를 찾게 되는데, 대개의 '내 일'은 곧 '내 이익'일 뿐이다.
그런데 최근의 행정환경을 보면 점점 더 '내 이익'들이 공공의 이익과 상충하는 부분이 많아지고 있다.
예를 들어 당신이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어느샌가 옆사람이 나타나 지금 막 당신 때문에 피해를 보았다고 난리 치는 게 요즘 세상이다.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사회가 물질화되고 모든 게 다 돈으로 지배되는 세상이다 보니 별의별 해괴한 주장과 논리들이 수도 없이 나타나곤 한다. 이렇게 '내 이익'과 '네 이익'이 첨예하게 맞붙어 버리면, 그리고 그 싸움에 매몰돼 버리면, 공공의 이익은 누구도 대변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선 고도의 합리성과 중립성이 요구되는데 오직 파지티브(positive)한 관점에서만 일을 바라보게 되면, 이것들을 모두 원만하게 중재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인기 없는 네거티브한 관점에게도 의자 몇 개 정도는 내어주어야 공공의 이익도 보장받을 수 있다. 조금 답답하더라도 때론 그것이 다수의 이익을 대변할 수 있으니 우직함이여! 자신의 자리에서 너무 오래 고민하며 스스로를 힘들게 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