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오이 Nov 04. 2022

세상은 원래 안 되는 일 투성이야


지난 글에 이어 또 한 번 네거티브한 이야기를 하나 더 풀어볼까 한다.


맡았던 투자유치 건 하나가 결국 쫑 날 분위기다.


최종적으로 PF 투자확약서가 기한 내 들어오지 못했다. 이전부터 물리적 시간상 불가능해 보였으나 대표는 잘 되어가고 있다고 자신 있어했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나를 기만한 셈이다. 하지만 그를 원망하진 않는다. 시행사의 입장을 이해한다. 최근 금리인상 등으로 개발 시행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남에게 돈 빌리는 일은 언제나 녹록지 않다. 대표는 처음에 조건부 투자확약의 건이라는 제목의 서류를 이쪽이 요청한 투자확약서라고 우겼다. 은근히 이쪽을 떠 본 것이다. 20여분의 통화는 차분히 또 잠시 격정적으로 이어졌다. 통화의 상대방은 이 프로젝트에 사활을 건 시행사다. 몇 십억 단위의 선투자금이 날아가고 그간의 프로젝트가 다 엎어질 판인데 그 호소의 절절함과 절박함을 공무원이 상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처음으로 직업인으로서 프로페셔널리즘이 얼마나 중요한 것이고, 또 그것이 혼탁과 불투명의 해상도를 높여 선명한 위치에서 어떻게 나를 지켜내는지 똑똑히 깨달았다. 대표가 이쪽을 상대적으로 나이브(naive)한, 그러니까 금융에 순진하고 경험 없는 공무원으로 인식한 것은 매우 치명적이었다. 좀 더 구체화된 투자의향서를 투자확약서라고 속이려 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임자를 잘못 만났다. 그것을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못했더라면 나는 나를 위험에 빠뜨림은 물론, 공공의 이익에도 심각한 손실을 초래할 뻔했다. 그는 1차 논쟁에 실패하자 내게 도덕적 부담을 지우려 했다. 이쪽의 말 한마디에 그의 프로젝트와 또 그 프로젝트와 관계된 모든 계약 관계들이 파투 날 것임을 호소했다.


처음으로 외롭고 무섭다는 생각을 했다. 치열한 공방 논리가 끝나자 영혼의 한쪽이 쑥 빠져나간 것 같았다. 방금 나는 한 사람을 절망의 구렁텅이로 떠민 것인지도 모르는데 사무실의 단란한 소음은 이쪽의 심각성에 대해선 얄궂을 정도로 무심했다.


관점의 차이는 의외로 많은 곳에서 드러난다.


이 투자 건으로 보자면 애초에 상호 간 디폴트 값이 달랐다. 이쪽은 이미 1년 전부터 결말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저쪽에서는 어떻게든 되는 일이라 주장해 왔다. 냉정하게 말해서 투자손실을 걱정해준 것도 늘 이쪽이었다. 하지만 손실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운이 좋아 엑시트(exit)까지 성공하려면 시행사는 어떻게든 프로젝트를 굴려가야만 하는 입장이었고, 이러한 사정은 투자확약서라 속인 조건부 의향서에서도 선명히 드러나 있었다.


시행사는 확실히 그리고  매우 절박했다. 본 PF도 아니고 에쿼티 참여에 건축 명의와 사업의 소유권까지 양보한 듯한데 끝내는 확약서를 받아오지 못했다. 현재 금융시장의 냉혹함이 이 정도일 줄이야....


단순히 이쪽이 감수해야 할 모든 리스크를 제거한 채 오직 사업자의 입장만 고려해보자면, 이 조건부 투자의향서는 그 옛날 거열형처럼 시행사의 사지와 목을 따로따로 매달고 금융, 신탁, 시공사가 각자의 이익을 향해서 무지막지하게 당길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누구 하나 선뜻 손해는 감수하려 하지 않으면서 혹시 모를 미래의 이익에 대해서는 전혀 양보할 계산이 없는 것이다. 철저히 방관과 관망으로 사업을 에워싸고 시행사의 다음 행동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딱한 사정을 앉히고 사업의 불투명을 지적하며 고별을 통보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매우 힘든 일이다.   


세상은 원래 안 되는 일로 기본값이 설정되어 있다.


되는 일로만 설정되어 있다면, 늘 만사형통이며 일이 술술 풀려야 할 텐데 세상엔 너무 많은 실패들이 넘쳐나고 있다. 나는 늘 이 기본값을 '데드리프트'와 같다고 생각하여 왔다.

데드리프트의 '데드'는 'dead weight'로서 저항값이 작용하지 않는 일종의 죽은 무게이다. 죽은 무게이므로 이 영점은 일종의 '안 되는 일의 상태값'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하중을 들어 올려야겠다고 마음먹고 다가서는 것이 사업의 시작이며, 거기서 리프트(lift)는 시작되고 이 리프팅이 바로 '안 되는 일의 상태값''되는 상태값'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무게를 들어 올리는 일인데 어찌 저항값이 없겠는가? 우리가 땀을 흘리며 얼굴을 찡그리고 온 힘을 다해 다리와 허리를 펴 올리는 것은 그 자체로 삶이며, 비즈니스이다. 우리가 오랫동안 이야기해온 인허가, 금융, 대출, 담보, 약정, 합의, 재무, 설계, 등의 다양한 절차와 형식들이 모두 우리가 겪는 저항값들이다. 이 저항값들은 우리가 어떤 무게를 들어 올리기 위해서 - 우리가 우주에 있지 않은 이상 - 반드시 작용하는 일종의 중력값인데 세상에는 이 저항을 정직하게 극복하려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 편한 것은 진정한 데드리프트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편하게 사업하려는 마음은 진정한 사업가 정신이 아니며 오직 안락함만을 추구하는 것도 진정한 삶이 아닐 것이다.


그리고 이 저항값에는 내가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한계점도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면 반드시 다칠 날이 다가올 것이며, 그 한계점을 시험할 땐 늘 보수적으로 접근하라는 조언을 하고 싶다. 또한 일은 되게 한다고 늘 선(善)이 아닐 때가 있다. 안 되는 상태로 놔두는 것이 때론 선이고 정의가 될 때도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개발과 보존의 고민도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문제는 되고 안되고의 논리가 아니라 거기에 숨어드는 인간의 욕망이다. 공무원은 그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전 05화 글쓰기와 웨이트의 상관관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