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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Dec 02. 2022

텍스트(글)를 다루는 사람은 아주 힘이 세다

텍스트(글)의 힘

최근에 개인적인 일로 두 건의 이의신청서를 작성한 일이 있습니다.


공공기관에 근무하면서 타 기관에 이의를 신청하자니 민원인의 입장을 다시한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개인이 기관을 상대하는 일은 역시 피로감이 큰 일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일반 탄원이나 민원글처럼 서술식으로 주욱 써 내릴까하다가 생각을 고쳐먹고 두 건 모두 법률 형식의 글쓰기를 취했습니다. 소송건으로 소장이나 준비서면을 접해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청구취지, 청구원인으로 서두가 장식되는 그 글쓰기 말입니다. 좀 더 이해를 돕자면 '소송비용은 피고의 부담으로 한다'는 문구가 들어가는 그 법률 문서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왜 이의(異議)가 있는지, 또 그 이의가 어떤 원인에서 기인하였는지를 권리 당사자의 위치에서 - 떼쓰기가 아닌 - 서술하자니 법률 형식이 가장 최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두 건 모두 아직 진행 중이라 이 글쓰기의 유용성에 대해서는 아직 저도 검증을 못한 상태입니다. 추후 기회가 되면 알려드리겠습니다.


저는 텍스트(글)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기왕 소장(訴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텍스트의 힘을 변론서를 통해 풀어보겠습니다.


만약 당신이 폭력사건에 휘말려 억울하게 피해를 보았는데 상대가 쌍방, 혹은 당신의 과실을 주장한다면 무엇으로 당신을 방어하시겠습니까? 당연히 증거를 통해서겠죠.

그런데 그 증거를 내밀며 조사 단계의, 나아가 소송단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구술로써 당신의 억울함을 설명하자면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겠습니까? 더구나 모든 정황을 구술로 풀자면 녹음장치를 틀어놓지 않는 이상 앵무새처럼 당신의 진술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일관될 순 없겠죠.


이때 당신의 입을 대신해 억울함을 정연하게 풀어줄 매개체가 바로 텍스트(진술서)입니다. 당신의 험상궂은 표정이나, 격앙된 목소리, 울끈불끈한 근육이 아니라 타이핑된 글씨 하나 하나가 당신을 지키는 힘이 됩니다.


그러니 이 글은 아주 잘 쓰여야 합니다.


벌금을 먹거나 행여 재수없으면 신변상 구속까지 감수해야 할 사안인데 한 개인으로서 이 문서 작성이 얼마나 신경 쓰이겠습니까? 밤새 고민해도 한줄을 못쓰겠고 도무지 답이 안나오니까 세상에는 그 글을 대신 써 주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 경우엔 변호사들이죠.


사실 변론서 작성은 변호사가 하는 일의 가장 핵심이 되는 일입니다.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왜곡되어 그렇지 변호사가 하는 일은 이 '변론서 작성이 거의 다'라고도 볼 수도 있습니다. - 물론 주관적인 의견입니다 -


공공기관에 근무하다 보니 가끔 업무상 소송건에 휘말린 직원들을 종종 보게 됩니다. 밤늦도록 캐비닛을 뒤지며 땀흘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안타깝기도 하고, 그래서 위로의 말이라도 건네려 "뭐하고 있어?" 라고 다가가면 변론에 참고할 증빙서류들을 찾는 중이란 말이 돌아옵니다.


증거자료 수집은 보통 의뢰인 쪽에서 수고를 들여야 합니다. 변호사가 직접 캐비닛 뒤지고 서류 정리하고 하지 않습니다. 변호사가 충분히 이해할 만큼 자세히 그리고 반복적으로 상황설명을 해야 하는 것도 당연히 의뢰인 몫입니다. 행정소송의 경우엔 관련 법률의 조항까지도 이쪽(공무원)에서 제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변호사를 고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궂은 일들을 의뢰인 쪽에서 도맡다 보니  '이럴 거면 내가 왜 변호사를 고용했나'란 푸념이 꼭 한 번씩은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진한 이야기입니다.

대한민국의 모든 직업군에는 그 직업군이 축적하여 온 그들만의 업력 혹은 업태의 관습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그 업태의 틀 안에서 그들의 언어와 규칙에 맞추어 대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을 무시하면 대화 자체가 성립되지 않거나 협상은 물론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없게 되죠

우리가 변호사를 고용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들 때문입니다.


잘 풀어진 텍스트가, 쓰임에 맞게 형식까지 갖추게 되면 그 자체로 힘이고 돈입니다.


제가 위에서 밝힌 이의신청서를 두가지 버전으로 작성했다고 가정해봅시다.

하나는 개인의 억울함과 읍소에 초점을 맞춰 그냥 주욱 써내린 반면, 하나는 이의 신청 취지와 이유를 밝히고 상대의 주장에 대한 문제점을 법률 등에 근거해 파훼하였다면, 받는 쪽에서 좀더 부담스러운 쪽은 어느 쪽일까요? 당연히 후자일 것입니다. 후자가 부담스러운 이유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쓰기의 형식이 언제라도 법률 다툼으로 전환될 수 있는 외형적 형식, 즉 무장된 갑주를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즘 책 읽고 글 읽는 사람 없다고 텍스트가 쓸모없어진 세상 같지만 글쓰기를 글(문학) 자체로만 이해하지 않고 문서상의 텍스트로 범주를 넓힌다면 이것이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 새삼 놀라게 됩니다. 자기소개서에서부터 각종 계약서, 협약서, 증명서 등의 모두 텍스트(내용)들이 하나같이 우리의 삶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죠.


결단코 문자는 영상에 밀리지 않습니다. 최첨단 과학과 기술의 집약체라고 일컬어지는 오늘날 영화산업의 기초도 글로 쓰인 시나리오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멀리서 찾을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우리의 능력을 가장 잘 어필할 수 있는 수단도 직장에서 늘상 올리는 그 기획안이나 보고서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가 언제나 멋진 기획안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드물다고 할 수 있죠. 기존의 것을 긁어 복사하는 대신 첫장부터 끝장까지 순수하게 자신의 역량으로 흰 여백을 채울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그러니 텍스트를 다루는 일은 추상속에서 논리를 캐는 일이며, 전략을 수립하는 일이며,  상상을 현실로 구현시키는 일이며, 당신의 가치와 철학으로 세상을 구하는 일입니다. 만약 이것이 어느 직업군에나 존재하는 이른바 명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면 얼마나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지는 당신의 상상력에 맡기겠습니다.


그러니 텍스트의 힘을 믿고 오늘 이 시간에도 그것을 다루는 일에 매진하고 있는 당신은,



아주 강력한 힘을 가진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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