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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Dec 20. 2022

겨울의 장례

겨울에 치르는 장례는 시리도록 아프다.


겨울은 우리의 슬픔 따위는 아랑곳 않는다는 듯 삶과 죽음의 보색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낸다. 매서운 칼바람 앞에 산자들은 옷깃을 여미기 바쁘고, 노제(路祭)에서는 무릎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재빨리 마른 자리를 물색한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이 세계의 본성이다. 다만 겨울의 장례에는 그것이 까치 날개의 희고 검은 경계처럼 더욱 선명히 드러날 뿐이다.


삶과 죽음을 일상의 레벨에서 특별히 생각하는 계기는 별로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생(生) 쪽에 치우친 들숨과 날숨을 호흡하고 있으니까. 우리는 숨을 쉬고 있다는 의식도 없이 살아가다 어느 날 벼락처럼 부고를 맞이한다. 이때 진짜 장례를 치르게 되는 사람은 그 이전에 다녔던 수많은 문상(問喪)의 경험이 얼마나 가볍고 형식적이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같은 장소, 같은 대상에 대한 애도라도 주(主)와 객(客)으로서 느끼는 슬픔 완전히 다른 차원의 깊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어쩌면 세상은 진짜 장례를 치러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는지도 모르겠다.


장례의 처음과 끝을 모두 참관하는 것은 생소한 일이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의 본성에 놀라기도 하고, 다소 충격을 받기도 한다. 장례과정에서 터지는 오열에 스스로 이렇게 큰 울음을 터트릴 수 나 싶기도 고, 그 전엔 결코 도달해보지 못한 - 아예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 저 심연의 절망과 우울의 바닥까지 떨어져 보기도 한다. 죽기 전, 인생의 모든 순간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간다고 했던가? 남겨진 자에게도 그 시간이 온다. 고인과 함께 했던 모든 순간들이 한 장 한 장 소환된다. 즐거웠던 순간, 행복했던 순간, 미안했던 순간. - 미안했던 순간은 그것이 무엇이었든 간에 그렇게 아쉽고 안타깝게 느껴진다. - 본격적인 장례절차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죽음에 대한 부정과 화(火)와 원망의 감정들이 모두 한데 섞인 복합된 사념으로 정신과 육체가 극도로 예민해진다. 특히 척수 신경은 한가닥 한가닥이 모두 바늘처럼 곤두서서 졸음은커녕 쪽잠 한숨도 그 날카로움에 감히 침투할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극도의 피로와 피폐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점점 더 또렷해져 가고 도무지 몸과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안절부절 좌불안석의 상태가 지속된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그만큼 받아들이기 힘든 자각이다.


사랑하는 사람 이름 앞에 붙은 故(고) 자는 얼마나 가슴 아픈가?


몸과 마음이 지쳐 자신이 상주인 사실조차 잠시 깜빡할 때, 저 자는 청천벽력처럼 다시 한번 그 사실을 상기시킨다. 상주는 스크린에 걸린 저 서슬 퍼런 자 앞에 또 한번 가슴이 철렁 내려앉으며 절망한다. 이제는 '그냥 어디 멀리 있어서 못 보는 사람처럼 해야지' 하고 마음먹지만 그 마음조차 자신의 요량임을 스스로에게 들키는 이 슬픈 기만은 아프다 못해 처절하다. 그것은 마음을 속일 수 있는 그 무엇의 범주가 아니다. 너무나 명확한 사실이라서 이 진실을 이길 수 있는 힘은 - 설령 전지전능함을 끌어온다 할지라도 -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에 까무러치고 만다. 이 고통과 상심을 계속해서 물레질하다 보면 비로소 왜 조상들이 장례를 3일 5일 치러가며 몸을 고되게 하는지 이유를 알게 된다. 그렇지 않고서는 도저히 저 명확한 명제로부터 극도로 예민해진 정신을 떨궈놓을 수 없는 것이다. 진짜 장례는 그런 것이다.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이쪽이 존재한다는 사실로 더욱 상처가 되곤 한다. 그래서 그 때문에 살아있음이 밉고, 미안하고, 죄스러운 순간도 있다. 그리고 겨울은 그 상반된 슬픔을 더욱 극명하게 드러내는 계절이다. 장지로 가는 동안 쉼 없이 뿜어 나오는 하얀 입김들, 화장장에서 두런두런 모여 피는 하얀 담배연기마저 우리가 너무도 생생히 살아있음을 증명하는 생체징후들이다. 상실의 슬픔이 클수록 그런 모든 것들이 속절없이 야속하고 원망스럽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기 힘들다. 장례가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난 어느 날, 화장실 변기 앞에서 아무 생각 없이 소변을 보다 저 아래로부터 올라오는 그 무럭무럭한 뜨거움에 갑자기 쏟아지려는 '왈칵' 같은 것이랄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생각했던 그 사소한 배설조차 내가 살아있으니 가능한 것이라는 깨달음은 동시에 죽었다를 또 한 번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기에, 싫고 밉고 부끄럽고 심지어 치욕적이기까지 하다. 나는 이것이 고인이 내게 주는 마지막, 삶에 대한 심미안이라고. 다만 믿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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