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긴오이 Dec 15. 2022

땅바닥을 기어본 적 있습니다

모욕감을 이기는 인내 / 라디오헤드 Creep

어떤 모욕은 완전히 치욕스럽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 모욕은 여럿을 함께 겨냥했기 때문에 총량으로서의 강도는 한 인격체로서의 존엄을 완전히 박살 낼 지언정 그것이 n빵으로 쪼개진다면 그럭저럭 견딜만한 것이 된다


"지금부터 호명되는 놈들은 좌측으로"


땅거미가 지기 시작하는 저녁, 식사 집합 오와 열을 앞에 두고 행보관은 냉랭하게 말했다. 체구만큼이나 목소리의 위압감이 남달랐다.

"xxx!,  / 병장 000 , xxx!, / 상병 000......!


한 사람 한 사람 호명될 때마다 뒤이어 관등성명들도 함께 차렷하고 따라붙었다.  불길한 저녁 공기는 의도를  드러내지 않았음에도 어느새 대 인원의 1/3 정도를 불러내고 있는 중이다. 마침내 마지막 이름이 호출되었다. 어색한 눈빛들은 우로 나눠진 군집 규모를 가늠하며 과연 이것을 가른 의문기준!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했다. 그러고 보니 좌측 대열은 어째 짬이 되는 놈들 뿐이다. 좌측으로 호명된 - 나를 포함한 - 동료 병장들도 하나같이 불길한 시선을 감추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썩어빠진 xx들, 돈이 없으면 처먹지를 말든가!  외상장부를 달아? 정신 나간 xx들.!"


'이런 젠장', 그렇잖아도 요 며칠 PX 관리병이 외상값이 쌓인다고 이래저래 걱정이 많더니 결국 터질 것이 터졌다. 좆댔음을 느끼는 순간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꿀꺽 넘어갔다. 채무로부터 선량한 우측 쫄다구들은 먼저 식당으로 올려 보내고,  


"앞으로 취침!" 행보관은 우리를 향해 나지막이 읊조렸다.


"니들은 밥 먹을 자격이 없는 xx들이야, 쓰레기 같은 xx들! 지금부터 식당까지 기어간다."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땅바닥을 마주하면 당혹감이 매우 크다. 이게 무슨 훈련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각개전투의 포복자세도 아니고, 갑자기 훅 들어온 흙냄새에 정신과 육체가 함께 놀란다. 우리는 지렁이처럼 꿈틀대기 시작했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 당장 눈앞에 꽉 찬 땅바닥과 앞사람의 군화 뒷발에 걷어 차이지 않게 조심했을 뿐 - 지금 돌아보면 땅바닥의 대칭점인 저 하늘 어딘가에서 이 등신 같은 기어감을 자괴하는 라디오헤드의 크립(Creep)이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우리는 비열하게도, 땅바닥을 기어 밥 먹으러 가는 중이다. 식당을 향해


외상값이라 봐야 개인당 삼천 원에서 만원 사이였을 것이다. 혹 만원을 넘어가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 두 명에 불과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30여 명을 모두 합친 금액이 채 20만원이 안되었다는 것. 푸념 속에서도 누군가는 재빨리 이 낭패감의 총액을 합산했다. 외상 취식이 잘못이라면 잘못이지만, 이 팔팔한 청춘들을 꼼짝없이 땅바닥에 기어 붙게 만든 이 20만원 짜리 채권은 그 알량한 행보관의 계급장에 엎어치기 되어 마치 200억짜리 채권 최고액을 선고한 마냥 엄청난 권력을 부여하고 있었다. 바닥을 기면서도 나는 아찔한 어지러움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말이 PX지 우리 포대에는 정식 PX는 없었고, 한 달에 한번 대대에서 적당량의 물건을 떼어와 임시로 운영하던 말 그대로 전방의 황금마차와 다를 바 없었다. 끽해야 일주일이면 다 소진될 군것질거리들이니 상병 아래로는 PX 근처엔 얼씬도 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허구한 날 병장, 상병들만 기분 내는 것은 아니니 후임들과 한자리하면 지갑이 훌쩍 오버(over)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만원도 안 되는 후임들 월급을 착취하는 파렴치들은 적어도 우리 사이엔 없었다.(당시 병장 월급이 얼마냐면 13,300원, 일병이 10,100원으로 지금 생각하면 웃음만 나온다.)


그날 바닥을 기었던 우리 불쌍한 청춘들 중엔 서울대 출신도 있었고, 영어 동시통역이 가능한 토익 고점자도 있었고, 어디 조직 생활하던 건달 형님도 있었고, 자동차 수리공도 있었고, 돈 많은 부잣집 자제분도 있었다.

군대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것말고는 나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행보관이 이 크립(Creep)한 쇼케이스에 수많은 개성과 인격들을 몰아넣고, 한 편으론 무심한 절대자의 뒷짐으로 저 앞을 걸어갔던 것은. 이 새낀 정말 죽여주게 특별한 존재였다.



I wish I was special(나도 좀 특별했으면 좋겠어)


you're so fucking special(넌 정말이지 죽여주게 특별한데)


but I'm a creep(난 너무 등신 같지)


I'm a wierdo(난 미친놈이야)


what the hell am I doing here(젠장 난 여기서 도대체 뭘 하고 있는거야)


I don't belong here(난 여기 속하지도 않는 몸인데)    라디오헤드 / <크립(Creep)>






이미 오래전 일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날의 기억이 떠오른 것일까?


흥분하신 손사례에 한 대 얻어터지는 것은 아닌가? 조마조마하면서도 한 편으론 그냥 웃음이 나왔다. 쭈욱 둘러앉으신 분들 모두 - 여전히 나를 포함해 - 연세는 자실만큼 자신 분들인데 갑자기 들이닥친 호통에 어느 분은 반쯤 일어난 자세로, 어떤 분은 아예 일어나다 주저앉은 상태로 날벼락같은 포화를 온몸으로 맞고 있다.


 "이따위로 일하면서 밥 먹을 생각을 해? 월급이 아깝다. 이xx들아"


'또 밥인가?' 까라면 까야하는 계급사회에서 멘털 터지는 충격은 저 군대 시절이 유일할 줄 알았는데 저 죽여주게 특별한 존재는 여기에도 있다. 이거 어떡하지?



나도 좀 특별해져 볼까나?


이전 02화 겨울의 장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