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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H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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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긴오이 May 30. 2024

그렇다고 젖꼭지를 파괴할 순 없잖아

손톱을 깎았다. 오후 다섯 시쯤 됐나? 일상의 퇴근이 이뤄지기 전 원룸 방안손톱깎이는 소리들만 튕겼다. 갑자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잠시 손을 멈췄더니 태초부터 이 세상엔 H와 손톱소리만 존재했던 듯 비현실적인 적막감이 확 다가왔다. 여름이 오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속에선 맴맴하고 매미소리가 들렸다. 기분 나쁜 이명이 가득했다. 이런 소릴 귓속에 달고 살았다니. H는 괜히 엄지와 검지에 힘을  줬다. 적막감 쫒고 서둘러 현실감을 소환했다.


그러고 보니 신체에서 정기적으로 깎여나가는 것들. H는 이틀에 한번 수염을 는다. 한 달이 조금 넘으면 이발을 한번 하고. 뭐  없나. 아! 요즘엔 사오일에 한번 코털도 다듬는다. 예전엔 코털 가위는 쓰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코털이 져나오면 보기 흉했다. 깎는다고 깎는데도 '흥'하고 풀면 어김없이 한 두 가닥이 삐져나온다. H는 코가 낮은 데다 약간 들창코 타입이라 코털이 더 자주 보인다. 수시로 손가락을 쑤셔 넣어 코털을 밀어 넣는다. 최근엔 아예 대화하기  검지가 콧속을 한번  다녀와야 안심이 된다. 입냄새가 그렇게 신경 쓰이더니 이젠 걱정거리 하나가 더 늘었다. H는 거의 털이 없는 지만 쓸데없이 한 두 가닥이 길게 자라는 곳들이 있다. 젖꼭지가 대표적이다. 언제부턴가 젖꼭지 옆으로 서너가 닥의 털이 길게 밀고 올라왔다. 그러곤 끝도 없이 자라났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잭과 콩나물도 아니고 계속해서 자라났다. 결국 제 길이를 이기지 못하 수양버들처럼 늘어졌다. 혹시나 해서 맞대봤더니 양쪽 젖꼭지 털이 거의 묶일 뻔했다. 기겁하고 잘라낸 기억이 있다. 목 뒤 큰 점에서도  두 가닥이 길게 자라났다. 점을 빼버리면 털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점을 빼고도 털은 계속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흑두 아래 무슨 마르지 않는 영양샘이 있나. 그런 게 있다면 탈모는 금방 정복될 수 있을 텐데. 모발 이식에 돈을 쓸게 아니라 피부 아래 영양 지층을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젖꼭지 털은 만고에 쓸모없다. 가 지들끼리 서로 엉켜 따끔거리는 경우가 다. 그렇다고 젖꼭지를 파괴할 순 없으니 대신 털을 잘라줘야 한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거리인가. 사람 몸은 늙는데도 이상하게 털들은 기력을 쇠하질 않는다. 나이쯤 되면 머리숱도 자라는 속도를 줄일 것 같은데 모발이 가늘어지긴 해도 자라는 속도는 여전하다. 코털도 하얗게 쇠기는 해도 끊임없이 삐져나온다. 손톱도 그렇지만 발톱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금방 깎은 것 같은데도 내려다보면 공룡발톱을 자랑하고 있다. 어쩔 땐 손톱깎이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도 있다.  


뚝뚝 끊기는 손톱을 바라보며 무슨 근사한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했는데 이내 관두기로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슬견설에서 개나 이나 그 죽음은 똑같은 것이라며 변증법적 사고 전개했다는데 H로서는 도무지 그런 생각은 나지 않았다. 개나 이가 똑같다니 그런  억지스럽지 않나. 사유가 깊지 못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지만 때론 이런 심플한 자기 항복도  문학적이 생각이 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단순하고 숏츠한 재미가 우선인 시대니까. 너무 어려우면 오히려 안 읽힌다. 보단 H가 지금 더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건 언제까지고 온전하게 혼자 힘으로 손톱 발톱 깎고 양치하고 머리 감는 것이다. 사소함들을 내려다보면서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부디 무럭무럭 만 자라다오. 생의 징후여. 깎는 건 내게 맡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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