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을 깎았다. 오후 다섯 시쯤 됐나? 일상의 퇴근이 이뤄지기 전 원룸 방안은 손톱깎이는 소리들만 뚝뚝 튕겼다. 갑자기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잠시 손을 멈췄더니 태초부터 이 세상엔 H와 손톱소리만 존재했던 듯 비현실적인 적막감이 확 다가왔다. 여름이 오기도 전인데 벌써부터 귀 속에선 맴맴하고 매미소리가 들렸다. 기분 나쁜 이명이 가득했다. 이런 소릴 귓속에 달고 살았다니. H는 괜히 엄지와 검지에 힘을 더 꾹 줬다. 적막감을 쫒고 서둘러 현실감을 소환했다.
그러고 보니 신체에서 정기적으로 깎여나가는 것들이 있다. H는 이틀에 한번 수염을 깎는다. 한 달이 조금 넘으면 이발을 한번 하고. 뭐 또 없나. 아! 요즘엔 사오일에 한번 코털도 다듬는다. 예전엔 코털 가위는 쓰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코털이 삐져나오면 보기 흉했다. 깎는다고 깎는데도 '흥'하고 풀면 어김없이 한 두 가닥이 삐져나온다. H는 코가 낮은 데다 약간 들창코 타입이라 코털이 더 자주 보인다. 수시로 손가락을 쑤셔 넣어 코털을 밀어 넣는다. 최근엔 아예 대화하기 전 검지가 콧속을 한번 쓱 다녀와야 안심이 된다. 입냄새가 그렇게 신경 쓰이더니 이젠 걱정거리 하나가 더 늘었다. H는 거의 털이 없는 신체지만 쓸데없이 한 두 가닥이 길게 자라는 곳들이 있다. 젖꼭지가 대표적이다. 언제부턴가 젖꼭지 옆으로 서너가 닥의 털이 길게 밀고 올라왔다. 그러곤 끝도 없이 자라났다. 처음엔 별생각이 없었는데 잭과 콩나물도 아니고 계속해서 자라났다. 결국 제 길이를 이기지 못하고 수양버들처럼 축 늘어졌다. 혹시나 해서 맞대봤더니 양쪽 젖꼭지 털이 거의 묶일 뻔했다. 기겁하고 잘라낸 기억이 있다. 목 뒤 큰 점에서도 한 두 가닥이 길게 자라났다. 점을 빼버리면 털도 사라질 줄 알았는데 점을 빼고도 털은 계속해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흑두 아래 무슨 마르지 않는 영양샘이 있나. 그런 게 있다면 탈모는 금방 정복될 수 있을 텐데. 모발 이식에 돈을 쓸게 아니라 피부 아래 영양 지층을 연구해야 하는 건 아닐까. 어쨌든 젖꼭지 털은 만고에 쓸모없다. 가끔 지들끼리 서로 엉켜 따끔거리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젖꼭지를 파괴할 순 없으니 대신 털을 잘라줘야 한다. 이 무슨 쓸데없는 짓거리인가. 사람 몸은 늙는데도 이상하게 털들은 기력을 쇠하질 않는다. 이 나이쯤 되면 머리숱도 자라는 속도를 줄일 것 같은데 모발이 가늘어지긴 해도 자라는 속도는 여전하다. 코털도 하얗게 쇠기는 해도 끊임없이 삐져나온다. 손톱도 그렇지만 발톱은 어찌나 빨리 자라는지. 금방 깎은 것 같은데도 내려다보면 늘 공룡발톱을 자랑하고 있다. 어쩔 땐 손톱깎이가 부러지는 건 아닐까 걱정될 때도 있다.
뚝뚝 끊기는 손톱을 바라보며 무슨 근사한 의미를 부여해 보려고 했는데 이내 관두기로 했다.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슬견설에서 개나 이나 그 죽음은 똑같은 것이라며 변증법적 사고를 전개했다는데 H로서는 도무지 그런 생각은 나지 않았다. 개나 이가 똑같다니 그런 건 좀 억지스럽지 않나. 사유가 깊지 못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없다지만 때론 이런 심플한 자기 항복도 꽤 문학적이란 생각이 든다. 누가 뭐래도 지금은 단순하고 숏츠한 재미가 더 우선인 시대니까. 너무 어려우면 오히려 안 읽힌다. 그보단 H가 지금 더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건 언제까지고 온전하게 혼자 힘으로 손톱 발톱 깎고 양치하고 머리 감는 것이다. 사소함들을 내려다보면서 새삼 감사함을 느꼈다. 부디 무럭무럭 만 자라다오. 생의 징후여. 깎는 건 내게 맡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