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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은지 김치찌개

40년의 냄새

by 책방별곡

냄비 뚜껑을 여는 순간 김이 폭 하고 피어올랐다. 묵은지의 새콤한 향이 부엌 공기 위로 번졌다. 스테인리스 숟가락을 손에 든 아이가 국물을 한 입 떠먹더니 얼굴을 찌푸렸다.

"엄마… 김치찌개가 맵기만 하고 맛없는데?"

그 말이 머리에 톡 하고 박혔다. 김치찌개를 맛있게 먹는 아이를 상상하던 마음이 쭈그러들었다. 녀석은 맵고 짜기만 하다고 물만 벌컥벌컥 마셨다. 냄비를 들여다보니 묵은지 국물과 기름이 어색하게 둥둥 떠 있었다.

결국 나는 휴대폰을 들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들려온 엄마의 목소리는 오래 묵힌 장맛처럼 단단하고 친근했다.

"엄마, 김치찌개 어떻게 끓여야 맛있어?"
"왜? 우현이가 맛없다나?"


마치 보고 있는 것처럼 맞히는 통에 웃음이 새어 나왔다. 엄마는 가여운 딸을 위해 구체적인 레시피를 쏟아냈다.

"묵은지는 국물을 꼭 짜야한다. 그냥 넣으면 맛이 텁텁하다. 참기름 조금 두르고 살살 볶아라. 숨이 죽을 때까지. 그다음 다시다 넣고 맛술도 한 숟가락 넣어라. 마지막에 버터 조그만 거 하나 넣으면 감칠맛이 확 살며 국물이 부드러워진다.”

엄마의 말투는 부엌 한구석에서 볶는 참기름처럼 생생했다. 전화기 너머로 묵은지가 지글지글 볶아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녀의 손에 쥐어진 주걱이 어느 방향으로 움직이는지 상상까지 됐다. 전화를 끊고 망한 김치찌개는 버린 후 씻은 냄비를 다시 올려 불을 켰다.


묵은지를 손으로 꽉 짜니 시큼한 국물이 손가락 사이로 흘렀다. 팬에 참기름을 두르니 고소한 향이 먼저 튀어 올랐다. 묵은지가 달라붙는 소리, 주걱으로 눌렀을 때 터지는 촉감, 공기 중에 번지기 시작한 하얀 김까지 엄마의 부엌 냄새가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마지막에 버터 한 조각을 떨어뜨리니 녹아내리는 버터가 찌개 전체를 감싸며 고소한 풍미가 만들어졌다. 기름이 동글게 퍼지며 오묘한 황금빛을 만들어냈다.

다시 끓인 찌개를 아이가 한 입 뜨더니 무심하게 말한다.

"이건 맛있네."

그 한마디에 마음이 말랑해졌다. 내 뒤에 서 있는 엄마의 그림자를 아이가 알아본 것 같았다.
부엌에는 매콤한 묵은지 향이 진득하게 남았다. 그 냄새 속에는 엄마가 전해준 비법뿐 아니라 그녀가 나를 위해 수없이 되뇌었을 저녁들의 기억까지 얹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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