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쓰고 뜨거운.
남편은 해마다 동짓날이 가까워오면 같은 말을 했다.
“우리 엄마 팥죽이 제일 맛있다. 당신도 가서 좀 배워온나.”
그 말에는 장난기 반, 그리움 반의 묘한 온기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나는 단팥죽이 좋거든. 어머니 팥죽은 너무 쓰다.”
“그게 진짜 팥죽이지. 단팥죽은 그냥 간식 아니가?”
대화는 늘 그렇게 끝났지만 마음 어딘가에 누군가의 겨울은 쓴맛으로 또 다른 이의 겨울은 단맛으로 기억된다는 사실에 이질감이 들었다.
작년 겨울 눈 대신 비가 내리던 날이었다.
유튜브 검색창에 ‘팥죽 끓이는 법’을 쳤다. 수많은 영상이 떠올랐다.
“팥은 한 번 끓여서 삶은 물을 버리세요.”
“껍질은 체에 곱게 내리면 식감이 부드러워요.”
영상 속 손은 단정했지만 냄비에서 피어오르는 김은 이상하게 차가웠다. 팥죽을 끓인다는 건 단순히 요리의 기술이 아니라 누군가의 시간을 따라 걷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팥이 팔팔 끓기 시작하자 공기 속에 쌉싸래한 향이 번졌다. 처음엔 냄새가 낯설었다. 붉은 김이 서린 냄비 속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엄마의 부엌이 떠올랐다. 그녀의 부엌은 늘 따뜻했다. 하얀 김이 부엌 천장에 닿고 창문 유리엔 성에가 꽃처럼 피었다. 팥이 푹 퍼질 때까지 엄마는 국자를 천천히 저었다.
“팥은 마음 급히 끓이면 써진다. 천천히 끓여야 단맛이 살거든.”
그때 나는 그저 새알심을 훔쳐 먹느라 바빴지만
지금 생각하면 엄마의 말은 인생에 대한 조리법 같았다.
나는 팥죽을 저으며 새알심을 굴렸다. 작은 반죽 덩어리가 내 손끝을 따라 둥글게 돌아가며
한순간 겨울밤의 엄마 손처럼 느껴졌다.
김이 피어오를 때마다 김 안에서 엄마의 얼굴이 떠오르고 팥죽이 끓는 소리가 어린 시절의 시간처럼 부글부글 이어졌다. 팥이 퍼지고 냄비 안이 걸쭉해질수록 공기 속은 단내와 쓴내가 함께 맴돌았다. 그 두 가지 냄새가 어쩐지 나와 남편의 맛 취향 같았다.
남편이 퇴근해 들어오자 그릇을 내밀었다.
“이거는 단팥죽이야. 설탕을 듬뿍 넣었다.”
그는 국자를 들고 한입 뜨더니 이마를 찡그렸다.
“팥죽이 아니네.”
나는 웃었다.
“그래도 맛있쟤?”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는 이상한데 먹을수록 맛은 있네.”
숟가락을 들어 내 몫을 떴다. 뜨거운 죽이 혀끝을 스쳤다. 처음엔 쌉쌀했지만 곧 부드러운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팥 알갱이가 살짝 으깨지며 내는 소리, 뜨거운 김이 코끝을 스치는 감촉..
그 순간 나는 엄마의 부엌으로 돌아갔다.
단팥죽 한 그릇 안에 엄마의 시간과 내 시간이 포개져 있었다.
우리는 서로의 그릇을 바꿔 한입씩 떠먹었다. 남편의 그릇엔 동지 팥죽, 내 그릇엔 단팥죽이 들어있었다. 그는 내 팥죽을 맛보며 웃었고 나는 그의 팥죽을 맛보다가 뜻밖의 단맛을 느꼈다. 쓴맛 속에 숨어 있던 단맛, 단맛 끝에 남은 쓴 여운이 이상하게 닮아 있었다. 나는 여전히 단팥죽을 좋아한다. 남편은 여전히 동지 팥죽을 찾는다. 달고 쓰고 뜨겁고 따뜻한 그 복잡한 맛 속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기억을, 서로의 온기를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