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Oct 25. 2024

과꽃

      

과꽃, 동요가 먼저 생각나는 꽃. 꽃밭 가득 피었던 꽃, 아니 우리 마당 가득 피었던 꽃이다. 그랬다. 나는 그해 봄에 과꽃을 꽃밭은 물론 마당귀를 뺑 돌아가며 심고 그래도 모종이 남아 마당 텃밭 앞에도 심었다. 그해 봄은, 객지에 나갔다가 건강이 나빠 돌아온 겨울이 지나고 맞은 열여덟 살 봄이었다. 그 많은 과꽃 모종을 어떻게 구했는지 생각나지 않는다. 그때까지 우리 집 꽃밭에는 과꽃이 없었다는 걸 생각하면 분명히 어디선가 얻어온 게 틀림없었다. 


엄마는 꽃밭에 몇 포기만 심으면 되지 마당귀고 마당복판이고 온통 꽃을 심으면 어떡하느냐고 한소리 하셨으나, 나는 들은 척하지 않고 심었다. 내 고집을 아는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하지 않았다. 객지생활에서 얻은 건 빈혈이었다. 현장에서, 길에서, 아무 데서, 자꾸 쓰러졌다.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잠들지 못한 채 산업현장에서 여물지 않은 심신을 담금질하는 게 힘에 부쳤던 모양이었다. 견디다 못해 겨울이 끝나갈 무렵 귀향했다. 


집이라고 해서 편할 게 없었다. 가장이나 다름없었던 나는 궁색한 가계와 동생들 학비 때문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시 얼른 건강해져서 도시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이 뇌리를 지배했으나, 마음대로 되지 않아 괴롭고 암담했다. 엄마와 할머니는 내 건강을 염려해 산 입에 거미줄이야 치겠느냐며 조바심하는 나에게 더 머물기를 종용했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만 현실은 달라서, 마을에서 좀 산다는 집 아이 둘을 가르쳐 용돈벌이를 하며 견디다 보니 봄이 되었다.


무엇에든 마음을 붙여야 해서 그랬던 걸까. 늦은 봄비가 흠뻑 내리던 날 우산을 쓰고 과꽃 모종을 심었다. 속으론 나도 울고 있었다. 꿈을 펼칠 수 없는 현실이 야속했고, 내가 짊어지고 있는 장녀의 무게가 무거워 휘청댔다. 그건 누가 강요한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암묵적으로 지워준 아니 스스로 진 짐이었다. 물론 지금 그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그걸 스스로 질 수밖에 없는 사람이다. 


그해 과꽃이 피기도 전에 나는 또 객지로 나갔다. 아직 어지럼증은 여전했고, 얼굴엔 노랑꽃이 피었지만 번민을 둘러쓰고 피하는 것보다 죽든 살든 부딪치며 해결하는 게 내 성정에 맞았다. 말리는 엄마와 할머니를 뒤로 하고 가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았던 건, 한 푼이라도 벌어 살림에 보태는 길을 택하는 게, 번뇌에서 헤어나는 길이라는 걸 난 알았기 때문이다. 할 노릇하는 거라는 생각도 했다. 


그렇게 가을 추석이 될 때까지 도시 한 귀퉁이에 몸을 기대어 살며 속이 여물어갔다. 추석 맞아 집으로 갔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지르고 말았다. 내가 심은 과꽃이 피어 온 집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꽃밭에, 마당귀에, 마당 텃밭 둘레에, 온통 짙붉은 과꽃이다. 올해도 과꽃이 피었습니다, 꽃밭 가득 예쁘게 피었습니다, 동요가 저절로 흘러나왔다. 나 없이도 무성하게 자라 저렇듯 꽃 피운 과꽃이 그렇게 대견할 수 없었다. 


추석을 집에서 보내는 동안 마당과 꽃밭에 핀 과꽃을 실컷 보았다. 송편 만들다가도 보고, 수돗가에서 펌프질 하다가도 보고, 밥 먹다가도 보았다. 엄마는 과꽃 피는 것을 보고, 심은 사람은 못 보는데 우리만 본다고 할머니와 이야기하셨단다. 도대체 엄마들은 왜 그렇게 집 나간 자식을 그리워하는 걸까. 내가 어미가 되어보니 그건 우문 중의 우문이다. 그렇게 명절 내내 과꽃을 보고, 다시 또 객지로 나갔다. 


때론 집안을 환하게 하던 과꽃이 눈앞에 어른댔다. 꽃씨를 받아놓으라고 부탁했지만 믿을 수 없어 편지에 그 말을 써서 보내기도 했다. 비뚤비뚤하지만 서정성 가득한 엄마의 편지에 걱정마라는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엄마의 편지를 읽고 또 읽다 울어 편지지가 얼룩지기도 했다. 


열아홉 살을 앞두고 설을 쇠러 집에 왔을 때 과꽃은 흔적도 없이 뽑히고 말았다. 깔끔한 엄마가 마른 대궁을 다 뽑아 태워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꽃씨를 받아놓으셨다. 다음 해에 그 꽃씨를 심었는지 어쨌는지 기억에 없다. 그 후로 우리 집에서 과꽃을 본 적이 없으니까. 서울에서의 삶이 더 분주해지고, 꿈을 향해 더딘 발걸음을 옮기느라 집에 가지 못했고, 과꽃에 더 이상 관심을 쓰지도 못했다. 


힘들고 암담할 때마다 숨통을 틔워주고 위안을 주었던 게 어디 과꽃뿐이랴. 바람도, 구름도, 저 하늘도, 또 밤하늘의 별과 달도, 심지어 반딧불이도 내게 벗이 되고 힘이 되어주었다는 것을, 나는 잊지 않는다. 적은 월급에서 떼어, 벼르고 별러 사서 닳도록 읽었던 한 권의 책도. 내가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건 어릴 적부터 가졌던 꿈이지만 자연과 교감하면서 더 깊어지지 않았나 싶다. 


과꽃, 동요가 먼저 생각나는 꽃이지만 내게는 힘든 날을 견디게 해 준 친구 같은 꽃이다. 잊고 있었는데, 이 글을 쓰는 지금 마당 가득 피었던 짙붉은 과꽃이 선연히 떠오른다. 열여덟 살 나의 모습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