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Oct 24. 2024

원추천인국

 

한동안 내가 자주 가던 곳이 있었다. 일 년 동안엔 매일 갔고, 그 후엔 일주일에 서너 번씩 갔었는데, 그곳엔 해바라기를 닮은 진한 노란색 꽃이 여름내 피었다. 꽃잎이 길고 원추형으로 색깔은 꼭 해바라기 꽃 같았다. 그래서 닮았다고 생각했나보다. 어떻게 보면 꽃잎이 큰 국화 같기도 했다. 그 꽃 이름이 원추천인국이다. 루드베키아라고도 하는.


나는 아무런 근거 없이 원추천인국을 천국의 꽃이라고 생각했다. 그저 천국에는 이렇게 신비로운 꽃들이 피어 있을 거라고 막연히 믿었던 걸까. 모르겠다. 그곳이 묘원이어서 그랬을까. 그럴지도 모른다. 묘원 들어가는 입구부터 원추천인국이 피고 졌다. 유월부터 구월 즈음까지. 그곳에 갈 때마다 가슴이 터질 듯 아파오다가 원추천인국이 보이면 긴 한숨과 함께 아픈 가슴이 가라앉았다. 이렇게 아름다운 꽃동산이 천국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다음 해에도 그곳에는 원추천인국이 피었고, 그다음 해에도 피었다. 그 꽃을 보면서 나는 영락없이 천국을 떠올렸고, 그런 꽃동산에서 거닐고 있는 어떤 사람의 모습을 그려보곤 했다. 이름 때문에 그랬는지도 모른다. 원추형으로 생긴 하늘나라의 국화 같은 꽃, 원추천인국이 뜨거운 태양 아래 반짝거리고, 산바람에 한들거리며 나를 맞이했다. 때론 햇볕보다 더 뜨거운 울음을 울었고, 때론 산바람 보다 더 마음이 흔들려 괴로웠다. 그런 중에도 원추천인국은 가만가만 나를 다독여주었다. 


인생이라는 게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후에 다시 또 반드시 만난다면, 그곳은 저 꽃이 피어 있을 것 같은 천국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원추천인국이 특별한 꽃으로 내게 다가왔던 걸까. 아무튼 그때 이후로 그 꽃은 내게 예사로운 꽃이 아니었다. 어디서든 원추천인국이 보이면 가서 향기를 맡고 들여다보며 혼잣말했다. “천국에도 이 꽃이 피었겠지? 여기와 달리 사시사철 피겠지? 저 꽃을 보는 그곳 사람들의 마음은 저렇게 환할 거야.”라고. 


그렇게 몇 년 동안 묘원에 갈 때마다 여름이면 보던 꽃이었는데, 언젠가부터 볼 수 없었다. 가만히 보니 꽃밭을 없애고 다른 용도로 쓰고 있지 뭔가. 아쉬웠다. 묘원에 갈 때마다 천국을 그려보곤 했는데. 물론 천국은 이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울 것이다. 세상의 언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이니 원추천인국을 보며 그려봤을 뿐이다. 그 후 몇 년이 또 흘렀지만 여전히 그곳에 원추천인국은 없다. 


지금 사는 우리 집 뒤는 산이다. 몇 년 전 산에 가다가 깜짝 놀랐다. 산에 오르는 입구 둔덕에 원추천인국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이사한 후 몇 년 동안은 볼 수 없었는데, 꽃밭 조성을 다시 하면서 심은 모양이었다. “어머나! 너 여기 있었구나!” 반가워서 눈물이 다 났다. 가슴에 싸한 기운이 몰려오더니 급기야 눈물샘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같이 갔던 사람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호들갑을 떨었다. 


그 후로 몇 년 동안 그곳엔 원추천인국이 노랗게 피어 있었다. 산에 오르고 내리며 보던 그 꽃, 그리움과 서러움이 범벅된 눈물을 자아냈던 원추천인국. 천국에도 저렇듯 곱게 피어 있을 것 같고, 꽃의 정령이 내 마음을 천국에 있는 이에게 전해줄 것 같아, 나의 혼잣말은 길고도 길었다. 어느 땐 아무 말 없이 보기만 한 적도 물론 있지만. 


이제는 산 입구에 있던 원추천인국도 없다. 같은 꽃만 보면 주민들이 지루할까 봐 다 캐내고 꽃을 바꾸어 심는 걸까. 아니면 수명이 다한 걸까. 원추천인국이 보이지 않던 첫해에는 다음 해엔 피겠지 싶었다. 하지만 다음 해 또 다음 해에도 피지 않았다. 내가 못 본 새에 이미 진 것도 아니었다. 원추천인국이 피는 시기는 석 달 정도로 제법 길기 때문이다. 


궁금증을 견디다 못해 언젠가 공원 관리하는 사람에게 물었다. 여기 있던 꽃이 모두 어디로 갔느냐고. “꽃 저기 있잖아요. 안 보여요?” 관리하는 사람은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곳엔 금계국이 피어 있었다. “저 꽃 말고 꽃송이가 더 크고 노란 원추천인국이라는 꽃이요.” 그 사람은 날 숫제 이상하다는 듯 조금 더 큰소리로 말했다. “저게 노란 꽃이지, 하얀 꽃인가요? 허참!”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다. 맞다, 그 사람 말대로 원추천인국이나 금계국이나 노랗긴 마찬가지다. 


같은 노란 꽃인데도 느낌은 전혀 다르다. 처음 원추천인국을 본 게 소중한 사람이 잠든 곳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슬픔이 지나쳐 서럽기까지 하던 그때, 나는 저 꽃을 보며 천국의 모습을 그렸다. 그럼으로써 위로받았고, 언젠가 저렇듯 원추천인국이 피는 천국에서 다시 만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을 정도로 현실감각을 잃었던 날이었다. 이제 그런 날도 저런 날도 다 가고 오늘의 삶을 살고 있다. 


내 삶의 여정에서 가장 슬프고 힘들었던 그 즈음, 위안이 된 꽃이 원추천인국이다. 유독 그즈음 그 꽃이 그곳에 피어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내겐 참으로 특별한 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또한 인연이 아닌가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