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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21. 2024

상사화


우리 집 뒤란 앵두나무 옆에 상사화가 있었다. 이른 봄에 파초처럼 힘차게 올라온 잎이 봄이 깊어가면서 무성해지고, 여름이면 짙은 암녹색이 되었다가 누릇누릇해졌다. 누릇누릇 지저분해지면 엄마는 인정사정없이 낫을 들고 잎사귀를 싹둑 잘랐다. 워낙 깔끔한 엄마 성격상 누렇게 시들어가는 잎을 봐줄 순 없었으리라. 그러고 얼마간 잊고 있으면 뾰족하게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올라오는 꽃대가 신기해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다 또 까맣게 잊고 있으면, 뒤란을 훤하게 밝히는 꽃이 피어 있곤 했다. 연분홍으로 보이기도 하고 연보라로 보이기도 하는 상사화다. 꽃이 어찌나 고상하고 수줍게 피어 있는지 하염없이 쳐다볼 때도 있었다. “예쁘냐? 저 꽃은 상사화란다. 잎과 꽃이 만날 수 없어, 서로 그리워만 한다잖니?” 엄마다. 내 등 뒤에서 엄마도 상사화를 보고 계셨다. 


엄마는 상사화 보며 아버지를 생각하셨을까. 스물일곱 살에 청상이 되어 우리 셋 키우느라 아버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고 했는데. 세상에서 잠시 만난 인연으로 칠십 년 가까이 혼자 사는 엄마와 아버지는 저 상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란의 상사화를 볼 때마다. 그것도 물론 내가 웬만큼 자랐을 때다. 그전에는 아버지가 본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삼촌을 아버지처럼 여기며 살아서 몰랐다. 


전에 살던 도시의 우리 집 뒤에 제법 큰 공원이 있었다. 여름 더위가 식어갈 무렵 공원 한쪽 한적한 오솔길을 걷다가 깜짝 놀랐다. 상사화 군락지를 만났기 때문이다. 쑥 올라온 꽃대 끝에 연분홍 꽃이 수줍게 웃고 있는 게 아닌가. “어머나! 예뻐라!” 탄성과 함께 고향집 뒤란을 떠올렸다. 그곳에도 지금쯤 상사화가 피었겠구나. 엄마는 뒤란에 서서 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실까 싶었다. 


몇 년 전 미국에 갔을 때도 상사화가 무더기로 핀 것을 보았다. 존 스타인벡 기념관으로 가면서 잠시 쉰 어느 들길에서다. 그때도 팔월 중순쯤이었다. 깜짝 놀랐다. 고향집 뒤란의 상사화보다 꽃송이가 더 크고 튼실했다. 땅이 넓으니까 꽃송이도 큰가 보다 생각하면서 반가운 마음에 얼른 뛰어가 보았다. 이국땅에서도 똑같은 꽃을 본다는 건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왔다. 동행한 사람들은 무심한 표정이었지만 내게는 그랬다. 한 사람은 꽃이 그다지 화려한 것 같지 않다고도 했다.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 꽃도 추억이 있어야 새롭게 보이는 것 같다. 


지금 사는 이 동네로 이사하고 천변을 걸으며 만난 꽃도 상사화다. 원추리와 개미취 분홍바늘꽃 부처꽃 등에 밀린 듯 풀 섶에 수줍게 피어 있었다. 그 많은 꽃들 중에 유독 내 눈길을 끌었다. 그 앞에 서서 고향집 뒤란 앵두나무 옆에 있던 상사화를 떠올렸고, 전에 살던 공원의 상사화, 이국땅에서 본 꽃송이 큰 상사화도 생각했다. 곱다, 화려하진 않아도 그냥 곱다. 색깔과 꽃모양 모두 곱다. 


이제 고향집 뒤란에 상사화가 피지 않는다. 뒤란에 나는 풀 뽑기 힘들다고 어느 해부터 제초제를 뿌리고 부직포를 덮어 놓아서 그럴지 모른다. 어쩌면 구근이 다 죽었을지도. 엄마가 연로해지면서 넓은 뒤란의 풀을 다 뽑지 못해 늘 걱정하셨다. 그러던 어느 날 마루 앞까지 뱀이 기어 다니더라며, 제초제를 뿌리고 그 너른 뒤란을 부직포로 덮어버렸다. 그 후로 상사화를 볼 수 없다. 


상사화 구근을 캐다 안마당 꽃밭에 심으면 될 건데 그랬다고 툴툴댔더니, 엄마는 말없이 눈만 곱게 흘겼다. 그 의미를 안다. 그것조차 엄마는 이제 힘들다는 것이리라. 다음에 가면 부직포 한쪽을 걷고 상사화 구근이 살아 있는지 캐보고 말리라. 나만큼이나 꽃을 좋아하는 엄마가 오죽했으면 그런 처방을 했을까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야 겨우 짐작해 본다. 꽃이 피면 뒤란에 서서 그 꽃 좋아하던 날 기다리는 것도, 수십 년 전에 하늘로 가버린 아버지 생각하는 것도, 엄마는 지쳤는지도 모른다. 


채송화도 다 뽑아버리고, 상사화까지 덮어버린 엄마의 속내를 지금에서야 알 것 같은 나를 어쩌면 좋은가. 겨우 전화 한 통 하는 것으로 마음을 전하는 건 너무나 얄팍해 가슴이 아파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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