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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20. 2024

벌개미취꽃

위로

   

구절초와 쑥부쟁이를 닮은 꽃이 벌개미취다. 국화와 비슷하기도 하다. 개미취와 벌개미취는 거의 형제처럼 닮았다. 그래서 뚜렷하게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구절초, 쑥부쟁이, 개미취보다 꽃이 진한 보랏빛이고 꽃잎 역시 약간 도톰하며, 작은 거베라처럼 보이기도 하는 꽃 벌개미취. 벌개미취 안에 벌새가 잉잉거리는 것을 본 적 있는데, 그래서 붙여진 이름인가 생각한 적도 있다. 아무튼 지금 내가 이야기하려는 꽃은 벌개미취다.


선배들과 함께 그녀의 별장이 있는 평창에 갔던 날이다. 그때 나는 심란한 일로 마음이 무겁고 답답했다. 산 하나 넘으면 또 산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힘든 일이 연속적으로 생겨 지친 심신으로 괴로웠다. 힘든 일이 왜 내게만 일어날까 싶어 의욕이 상실될 정도로 좌절의 늪을 헤맸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다는 가느다란 의지의 끄나풀을 붙잡고, 네 발로 기는 심정으로 간신히 삶을 이어가던 때였다. 누가 손끝만 대도 나는 나락으로 구를 것처럼 온 힘이 다 빠져 있었다. 


살다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지금이야 그런 생각이 들지만 당시에는 암담하기 그지없는 현실을 어쩌지 못했다. 살다 보면 어떤 방식으로라도 해결된다는 걸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저 지친 심신으로라도 짊어지고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밤에 잠자리에 들 때, 내일 아침에 눈 뜨지 않기를 기도할 정도였다. 그것이 현실회피이고 비겁한 생각이라는 것을 모를 리 없지만 그럴 정도로 지친 심신이었다. 


근처 사는 선배가 불쑥 전화해서 평창에 가자고 했다. 거절했는데 무슨 이유엔지 자꾸 졸랐다.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팔월 초였다. 여름휴가 겸 한 사흘 가서 쉬자는 거였다. 거긴 여기보다 기온이 낮으니까 시원할 거라며. 솔직히 나는 무더위고 뭐고 의식 못할 만큼 당면한 문제에 지쳐 있었다. 속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거절하기만 하는 것도 안 될 것 같아 마지못해 떠나기로 했다. 어릴 적에 가까이 지내던 선배 한 사람도 합류해 셋이서. 


선배의 별장은 휘닉스 파크 인근에 있었다. 짐을 풀고 난 후 우리는 그곳으로 산책을 나갔다. 아주 오래전에 가본 적이 있었지만 그때는 겨울이어서 스키 타는 사람들로 북적댔었다. 스키를 탈 줄 모르는 나는 눈 구경만 했었다. 마침 눈이 날리고 있어서 몽환적인 느낌이 나던 곳, 설경을 볼라치면 그곳의 풍경이 떠올라 아련해지곤 했던 곳, 바로 그곳의 한여름은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곳곳에 벌개미취 군락지가 있었다. 그렇게 많은 벌개미취꽃이 핀 곳을 본 적이 없다. 홀린 듯 꽃에 심취했다. 지금까지 심신을 피곤하게 했던 모든 일에서 놓여난 듯 홀가분한 기분이라고 할까, 아니, 꽃 때문에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하는 게 맞을 듯하다. 그랬다. 진한 보랏빛 벌개미취꽃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것 같았다. 꽃 삼매경에 들어가 하염없이 꽃을 응시했다. 선배들이 이제 다른 곳으로 가자고 채근하는 소리도 듣지 못할 정도로, 꽃에 빠져 있었다. 속이 후련했다. 꽃이 위로가 되었다.  


세상에는 위로가 되는 게 참으로 많다. 사람, 말, 밥, 독서, 글쓰기, 시간 등등. 그중에 꽃도 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어릴 적부터 유난히 꽃을 좋아하던 나다. 할머니 새참을 들고 들길과 산길을 걸을 때, 피고 지는 들꽃에 홀려 들여다보다 화들짝 놀라 산밭으로 뛰어 올라가던 나를 기억한다. 그때 보았던 현호색, 마타리, 꿀풀, 짚신나물, 괴불주머니, 으아리, 쑥부쟁이, 구절초 등 들꽃들은 유년을 떠올리면 자연스레 기억 속에서 되살아난다. 꿈과 현실의 괴리 속에서 어린 나는 그렇게 들꽃으로 위안을 삼았던 걸까. 


산책 마치고 별장으로 돌아와도 벌개미취꽃의 잔상이 남아 황홀했다. 꽃도 저렇듯 한 세상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좌절할 수 없다는 생각이 내 뇌리를 채웠다. 내려가 보자, 어디까지든 내려가 보자, 바닥을 알고 나면 다시 올라오는 길밖에 없을 테니까.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가슴이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선배들이 밥상을 차려놓고 몇 번이나 저녁 먹자고 불렀다는데 나는 듣지 못했다. 


저녁식사 후 밤하늘을 보았다. 쏟아지는 별빛을 온몸으로 받았다. 저렇듯 반짝이는 별, 고운 꽃, 시원한 바람, 좋은 사람들, 세상에는 이렇듯 아름다운 게 많은데, 왜 눈 뜨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했던가. 부정적인 요소들을 산바람에 날려 보냈다. 선배 말처럼 평창은 서울보다 시원했다. 저 별빛과 산바람 때문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 차고, 눈앞에는 여전히 벌개미취 그 고운 꽃이 어른댔다. 


내가 자주 산책하는 천변에서도 벌개미취꽃을 볼 수 있다. 유월 말쯤부터 구월까지. 벌개미취꽃을 볼 때마다 그날 그 평창의 풍경이 떠오르곤 한다. 힘에 겨워 허우적대던 날도. 그런 날들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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