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명숙 Oct 14. 2024

달맞이꽃

   

지천으로 피었던 달맞이꽃이 자취를 감추었다. 가을이 되었기 때문이다. 요즘엔 밤에 피는 노란색 달맞이꽃보다 새로운 품종의 낮달맞이꽃이 다양한 색깔로 피는 것을 볼 수 있다.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꽃은 재래종인 노란색 달맞이꽃이다. 밤부터 새벽까지 피어 있다가 낮엔 꽃잎을 닫는. 소박하고 수줍게 달빛 받으며 피어나는 걸 보면, 꼭 순박한 처녀처럼 공연히 가슴이 두근댄다. 자주 다니는 천변 산책로에 드문드문 피어 여름 내 행복감을 느끼게 했던 달맞이꽃. 


오래전 일이다. 잡지사로부터 오지 탐방하고 글을 한 편 써달라는 부탁이 있었다. 오지라면 친정 마을도 해당되지만 성의 없는 것 같아 고심한 끝에 문경의 어느 산골을 선택했다. 새벽에 잡지사에서 나온 사진 기자가 운전하는 차에 올랐다. 처음 만나는 그와 무슨 배짱으로 그 산골로 갔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다. 아마 애송이 작가인 나를 글 쓰는 사람으로 인정해 부탁했다는 게 함함해서 흔쾌히 응했던 모양이다. 


남편은 우스갯소리를 했다. 혹시 마늘 까는 곳으로 데려가는 것 아니냐고. 나는 눈을 흘기며 내가 무기인데 어딜 데려가겠느냐고 웃었다. 잡지사에 나온 낯선 기자는 말이 없는 남자였다. 문경까지 가면서 별 말을 한 기억이 없다. 나는 시집을 뒤적였고 기자는 묵묵히 운전만 했다. 사실 문경으로 정한 것은 나였고,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그곳으로 정한 이유 또한 나도 모른다. 


어둑한 새벽에 출발했는데, 문경에 도착했을 적엔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해가 뜨고 있었다. 그곳 어느 산자락에 살고 있는 화전민을 만나는 게 우리의 최종 목표였다. 솔직히 아무리 90년대라곤 해도 화전민이 어디 있을 거라고 그런 엉뚱한 생각을 했는지. 아마도 오지라고 하니 그런 곳을 취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산골짜기로, 산골짜기로, 차를 몰고 올라갔다.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자고, 그런 다음 산속으로 들어가서 화전민을 찾자고, 사진기자와 나는 아주 암팡진 계획을 급하게 세웠다. 


계획대로 산골짜기에 있는 어느 마을 앞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마을 뒷산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산속으로 난 길이 있었다. 마침 마을에서 만난 주민에게 저 산 위로 올라가면 마을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재를 넘으면 사람이 산다고 해서 그 산속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스러지지 않은 이슬에 바짓가랑이가 젖어도 화전민을 만나리라는 기대를 안고 산속으로, 산속으로 들어갔다. 


여름날이어서 해가 떠오르자 산 속이라도 땀이 났다. 얼마나 걸었을까. 산꼭대기에 이르렀을 때, 나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재를 다 넘자 편편한 분지가 펼쳐졌고, 거기에 노란 달맞이꽃이 가득 피어 있는 게 아닌가. 천국이 있다면 이런 곳일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름답고 평화로웠다. 아침 이슬을 머금고 핀 달맞이꽃이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다. 


나의 탄성에 기자는 빙그레 웃으며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나는 넋 잃고 달맞이꽃을 감상했다. 간헐적으로 들리는 비둘기 울음소리,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잉잉거리는 벌들, 눈앞에 펼쳐진 노란 달맞이꽃 무리, 세상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꽃밭이 있을까.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는지 알 수 없다. “이제 가봐야죠?” 기자가 말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금세 친해져서 오랜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달맞이꽃이 우리를 격의 없게 만들어주었던 것이다. 


산꼭대기에서 아래쪽으로 내려가 봤지만 화전민은 만나지 못했다. 다시 되짚어서 달맞이꽃밭으로 와 한참 동안 더 있다가 차를 세운 마을 쪽으로 갔다. 결국, 화전민커녕 주민도 한 사람만 만난 채 문경을 벗어났다. 인적이 드문 곳이니 오지는 오지 아닌가 싶다. 기자와 나는 그 달맞이꽃에 대하여 쓰고 사진을 첨부해 탐방 기사를 쓰기로 했다. 문경새재 넘어서 늦은 점심을 먹었으며 해가 있을 때 집에 도착했다. 


그 후 기자와 다시는 만난 적 없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 사람도 그럴 것이다. 하지만 달맞이꽃 흐드러진 그 분지에서 내가 지른 환호성에 빙그레 웃던 모습은 기억난다. 인생여정에서 그렇게 한 번 만나고 다시는 못 만나는 사람도 허다하다. 하지만 달맞이꽃을 보면 어색하기만 했던 여정에서 금세 친구처럼 가까워졌던 순간이 가끔 생각난다. 그 기자도 달맞이꽃을 볼 때, 애송이 작가로 흔쾌히 오지 탐방에 같이 갔던 나를 떠올릴까. 


이제 내년 여름이 되어야만 달맞이꽃을 볼 수 있다. 달맞이꽃이 달을 기다리듯 나도 꽃을 기다리리라. 기다림처럼 아름다운 것도 드물 테니까. 그리고 언젠가 문경 그곳에 꼭 가보고 싶다. 가더라도 찾을 수 있을까 싶지만. 못 찾아도 괜찮을 것 같다. 기억 속엔 분명히 있는 곳이므로. 벌써 여름이 기다려진다. 무덥고 힘든 여름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순전히 달맞이꽃을 보고 싶어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