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그해 고향집 마당귀엔 채송화가 흐드러졌다. 채송화를 닮아가는 엄마의 작아지는 키에 울컥 대는 마음을, 앞산 바람이 슬며시 불어와 쓰다듬어주었다. 뒤란에서 마당 한쪽으로 옮겨온 장독대에도 채송화와 엄마 키처럼 작은 항아리들이 놓였고, 그 항아리 주위에도 온통 채송화였다. 노랑, 빨강, 흰색 채송화가 마당귀와 장독대를 넘어 손바닥만 한 마당 텃밭 근처까지 넘실댔다.
여름 한낮 고향집에 도착했다. 꽃밭과 마당귀 장독대 앞까지 화사하게 활짝 핀 채송화가 나를 맞이했다.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머나! 예뻐라!” 마루에 앉아 계시던 엄마보다 채송화에게 먼저 인사를 한 셈이다. “이쁘냐? 너 보면 좋아할 것 같아 부러 안 뽑았는데.” 환하게 웃는 모습이 꼭 노란 채송화 같았다. 깔끔한 분이 꽃밭 바깥에 있는 식물을 뽑아내지 않은 게 의아했는데, 나 때문이라니. 그 마음의 충분히 알고도 남아 웃기만 했다.
엄마는 유난히 깔끔한 성격이다. 성정이 그렇고 살림도 더할 나위 없이 깔끔하게 하신다. 지금도 구순 노인 혼자 사는 집이라고 볼 수 없는데 벌써 몇 년 전이니 더욱 그렇지 않았으랴. 시골의 마당이나 뒤란에 풀이 나는 건 아주 흔하고 자연스러운 일인데, 우리 집은 달랐다. 일 삼아 풀을 뽑고 깨끗하게 하는 엄마 덕분에 풀은 발을 디디지 못한다. 엄마 입장에서 보면 채송화도 꽃밭 벗어나면 풀일 텐데, 나 때문에 참고 그냥 두었다니.
내가 어깨춤을 추며 안으로 들어갔다. 엄마는 자꾸 웃기만 했다. 당신의 생각이 맞았다고 생각해서일 게다. 자식은 부모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할 때 많은데, 부모는 다르다. 아, 나만 예외다. 난 아들딸의 생각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고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참으로 늦되는 사람이다. 언젠가 집에 갔더니 마당 한쪽 손바닥만 한 채소밭에 상추가 무성했다. 왜 안 뜯느냐고 했더니, 그때도 엄마는 그랬다. “너 상추 뜯는 거 재밌어하잖아. 온다는 소식 듣고 그냥 뒀지.”라고.
마루에 앉아 채송화를 보며 채송화 같이 작아진 엄마가 차려준 밥을 먹었다. 내가 차리겠다고 했는데, 밥만 푸면 된다며 부엌에 들어오지 말라고 손사래 치셨다. 엄마가 차려놓은 밥상을 내가 들고 마루로 왔다. 고봉으로 푼 쌀밥에 강낭콩이 드문드문 들어간 밥, 상추와 고기 몇 점, 청국장, 얼갈이배추김치, 호박나물, 양념한 고추장. 진수성찬이다. 거기다 마당에 색색으로 핀 채송화, 밥 먹는 나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엄마. 세상에서 더 이상 바랄 건 없었다.
엄마의 말씀에 의하면, 작년과 재작년에 마당귀까지 채송화가 한두 포기씩 나더란다. 그냥 내버려 두었더니, 올해는 온통 마당에 가득하더라고. 그래도 뽑아내지 않은 건 순전히 내가 좋아할 거라고 믿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채송화가 저렇게 많이 피니까 언제 좀 안 오나 싶어 몇 번이나 전화를 할까 말까 했는데, 이렇게 때를 맞춰 와서 보니 마음이 참 좋다며 입가에 미소가 가득이다. 깔끔한 엄마 성격에 두고 보자니 답답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딸이 좋아할 걸 아는데, 또 혼자 사는데 꽃이라도 친구 해주면 고맙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사이버 공간에서 한동안 ‘채송화’를 별명으로 사용한 적 있다. 그만큼 채송화를 좋아한다. 그런데 어느 순간 채송화가 나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바꾸었다. 실명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그토록 예쁘고 앙증맞으며 귀여운 꽃과 나는 영 아니다. 언젠가 고모는 내게 ‘수국’ 닮았다고 했으며, 학생들은 ‘맨드라미’ 이미지라고 했다. 두 꽃의 공통점은 꽃송이가 소담하고 큰 것인데, 결국 내 외양과 닮았다는 것이리라. 인정, 그래 인정한다. 이왕이면 외양만 아니라 속도 그렇게 넓고 크면 좋으련만 그건 또 아닌 것 같다.
엊그제 어느 집 앞에서 채송화를 만났다. 반가워서 화들짝 호들갑을 떨었다. 사진도 찍었다. 큰 플라스틱 용기를 덮을 정도로 온통 채송화다. 심은 사람도 보겠지만 지나는 길손들도 보라고, 버리고 말 플라스틱 용기에 채송화를 심었으리라. 그 마음이 곱지 않은가. 빨갛게 핀 꽃이 우리 고향집 마당에 피었던 채송화와 똑같다. 꽃잎이 외겹이었다. 꽃잎이 겹으로 피는 것도 있는데, 나는 외겹이 더 좋다.
지금은 고향집 마당에 채송화가 없다. 그해 여름 다녀온 후, 한동안 가지 못했다. 지난봄에 갔을 때 채송화 포기가 안 보인다고 했더니, 엄마가 나는 족족 뽑아버렸단다. 보는 사람 하나 없는데 지저분하게 놔둘 필요 있겠느냐며. “채송화가 질기기도 하지, 뽑아도, 뽑아도 올라오더라.” 엄마의 가슴에 올라오는 자식들에 대한 그리움을 그렇게 삭이셨을까. 사는 게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나 하고 마는 얄팍한 마음이 야속해졌다. 겨우, 엄마를 가만히 안아드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