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정원에 범부채가 다 졌다. 여름 내내 주황색 예쁜 꽃이 피고 지더니만. 옆에 있는 참나리에 비해 꽃이 아주 작았다. 예쁘면서도 단단하고 야무졌다. 그 무더위에도 잎사귀가 힘을 잃지 않고 꼿꼿해 그런 생각이 든 모양이다. 꽃잎 속에 박힌 작은 점들은 ‘깨순이’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어릴 적 친구를 떠올리게 했고, 범부채 꽃이 정원 가득 피었던 어느 펜션을 기억나게 했다.
예약한 펜션을 향해 가는 길은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고, 산골의 어둠은 순식간에 덮쳐 왔다. 운전이 조심스러웠다. 동강에서 너무 긴 시간을 보낸 게 문제였다. 산골의 밤길 그것도 산속에 있는 콘도를 찾아가는 길이 그렇게 어두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조붓한 길을 내비게이션과 이정표 보면서 운전했다. 왁자하게 떠들던 뒷좌석에 앉은 동료들도 나처럼 긴장한 듯 조용히 있었다.
왼쪽에 펜션 입구라는 표지판이 흐릿하게 보였다. 그제야 모두 한 마디씩 했다. 저기야, 휴, 무섭다 등. 속으론 긴장했지만 나마저 그럴 수 없어 애써 여유를 부렸던 나다. 외길로 된 아주 좁은 길 저만큼에 불빛이 훤한 곳이 있었다. 불빛을 향해 갔더니 예상대로 우리가 예약한 펜션이었다. 저녁 일곱 시 조금 넘었는데, 그렇게 캄캄하리라고 생각 못했다.
주인이 마당에 나와서 우리를 맞았다. 안 오는 줄 알았다며 웃었다. 주인아주머니는 ‘호호아줌마’를 닮았다. 푸근하고 동글동글 사람 좋게 생긴 그 모습에 우리의 긴장은 순식간에 풀어졌다. 마당에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밤하늘에 총총 박혀 있는 별은 고향의 우리 집 마당에서 보던 별과 같았다. 어서 짐 꺼내자는 동료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어 차 트렁크를 열었다.
우리가 예약한 방 이름이 ‘범부채’였다. 범부채 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당시엔 알지 못하고 4인용 숙소라는 것만 보고 예약한 방이었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이층으로 된 방이었다. 두 사람씩 위층과 아래층을 나눠 쓰기로 했다. 통나무로 된 방에선 향긋한 나무 향이 났다.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나무가 주는 평안한 느낌 때문이다. 자그마한 방이었지만 필요한 것들은 거의 다 준비돼 있었고 모두 만족해했다.
아직 저녁을 먹지 못한 우리는 대충 짐을 푼 후, 다시 숙소에서 나왔다. 있는 것 먹고 말자는 사람이 있었고 나도 그랬으면 했는데, 여행지에서 먹는 것만큼은 잘 먹어야 한다고 누군가 말하자, 그 말에 또 우리는 금세 동조했다. 이제 펜션의 위치를 아니까 캄캄해도 걱정되지 않았다. 아주 좁은 길을 다 빠져나왔을 때, 펜션 입구 푯말 아래 식당 이름이 쓰여 있었다. 선택하고 말고 없었다. 200미터라고 쓴 표지판이 반가울 뿐이었다.
막 문을 닫으려는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은 그냥 농가주택이었는데 약간 개량해서 식당처럼 보이는 곳이었다. 건넌방쯤으로 보이는 방에 자리 잡고 앉았고 주문을 하지도 않았는데 밥상이 차려졌다. 모두 약간 황당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방법이 없었다. 그냥 주는 대로 먹어야 했다. 호박눈썹나물, 가지나물, 무나물, 머위 잎 찐 것, 멸치볶음, 계란말이와 함께 시래기 된장국이 나왔다. 나물 한 가지 집어 입에 넣은 우리는 모두 눈을 크게 떴다. 맛이 그만이었다. 호박나물도, 가지나물도, 다 맛있었다. 더구나 쌉싸래한 머위 잎에 나물을 골고루 넣어 싸 먹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그렇게 맛이 자신 있으니 주문도 받지 않고 차려온 것 같다며 우린 정신없이 먹었다. 나물 접시가 비워질 만하면 또 나물을 갖다 주었다. 식사비를 배로 내야 할 것 같다고 누가 말해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여자들이 반찬을 많이 먹지 않던가. 더구나 나물이니. 주인이 비워진 밥상을 보더니 매실차 한 잔씩 갖다 주었다. 집에서 담근 것이니 소화제로 마시란다. 과식한 우리가 염려되는 모양이었다.
북통처럼 부푼 배를 안고 다시 펜션으로 돌아왔을 땐 밤하늘에 별이 더 총총했다. 밤새 무슨 이야긴지 나누었고, 둘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자리에 누웠는데도 배불러, 배불러, 얼마나 배부르다는 말을 했는지 귀에 쟁쟁했다. 멀리서 동강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여행으로 피곤했는지, 부른 배 때문에 혈당 스파이크가 일어 졸음이 몰려왔는지, 나는 자리덧과 상관없이 모처럼 푹 잤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아, 우리가 잤던 방문 앞 작은 화단엔 지고 핀 범부채 꽃이 가득했다. 푯말이 꽂혀 있었다. 범부채. 그제야 알았다. 이 꽃이 범부채고 그 꽃밭 앞에 있는 방이어서 이름이 그렇게 붙었다는 걸. 꽃잎에 깨 같은 점이 잔뜩 붙었는데 얼굴을 번쩍 들고 야무지게 피어 있는 꽃은 자존감 높은 어떤 여자애 닮았다. 그때부터였을 거다. 어디서든 범부채 꽃을 보면 반가운 게.
우리 아파트 화단엔 영월의 그 펜션처럼 범부채 꽃이 많이 피진 않는다. 하지만 여기저기 몇 군데 심겨 있다. 범부채 꽃을 보면 옛날 어둡고 조붓한 길을 조심조심 운전해 찾아가던 그 펜션이 생각나고, 나물과 반찬이 맛있던 그 식당이 떠오른다. 호호아줌마 닮은 펜션주인과 인심 좋은 식당 주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