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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Oct 26. 2024

접시꽃

   

서울의 위성도시 한 귀퉁이로 분가해 나온 건 스물여섯 새댁 때였다. 첫째아이 돌이 막 지나고 둘째를 잉태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을 이렇게 키울 수 없다는 한 가지 생각에 분가를 감행했다. 대단히 나아질 계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는데. 그저 이렇게 살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당시 무직 상태였던 남편은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농사지을 땅이 넉넉한 집도 아니었다. 겨우 설득하여 위성도시에서도 변두리로 분가한 터였다.


하루하루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결혼하면 내가 진 짐을 벗을 수 있으리라 막연히 기대했으나 형태만 다를 뿐 짐의 무게는 더 무거워졌다. 착하기만 한 남편은 짐을 나누어지거나 의지할 수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두 아이와 남편까지 내가 책임져야 할 삶의 무게로 다가오곤 했다. 긴 한숨만 흘러나왔다. 순전히 내 생각이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 내 삶이 힘들었던 건 그런 의식에서 발현된 게 아닐까 싶다.


분가해서 사는 건 부모님 슬하에 있을 때보다 나은 게 하나도 없었다. 하루하루 삶을 걱정할 정도로 여유가 없었고, 사는 곳마저 그 위성도시에서 가장 살 곳이 못된다고 소문난 동네였다. 이 년 전세 계약 기간만 지나면 이사하리라, 꼭 그러리라 결심하며 살았다. 살다 보니 삼십 년 넘도록 살다 십여 년 전에 지금 사는 이곳으로 왔다. 가난해도 행복하다는 건 이상일뿐이었다. 우린 자주 갈등하고 반목했다.


서른 살 즈음이었던가, 외출했던 남편이 시집 한 권을 건넸다. 도종환 시인의 『접시꽃 당신』이다. 그 시인의 삶을 모델로 한 영화까지 만들어져 상영될 정도로 인기 있는 시집이었다. 멋들어지게 사인까지 해서 내게 선물한 시집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그 시집의 내용도 그렇지만 나도 이렇게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그 꿈이 아주 요원해져 이룰 수 없다는 절망감 때문이었다.


그때 ‘접시꽃’이라는 꽃 이름을 처음 알았다. 뒷집 순이네 사랑채 담장 밑에서 여름이 다가올 무렵부터 가을까지, 꽤 오랫동안 피고 지던 꽃이 접시꽃이라는 것도. 순이네 사랑채 앞 작은 마당에서 고무줄놀이와 공기놀이에 빠져 있다가 저녁놀에 얼비치는 접시꽃을 보면, 얼마나 고아하고 예뻤던지. 꽃이 내 얼굴만큼이나 소담하고 커서 가만히 얼굴을 대보고 싶었다. 하지만 키 큰 줄기 겨드랑이에 꽃자루가 올라와 피는 꽃은 나보다 월등히 커서 대볼 수 없었다.


접시꽃 얼굴에 내 얼굴을 대볼 수 있게 된 것은 삼십 대 중반 즈음이었다. 삼십 초반에 설립한 유아교육기관에 온 정성 들이며 한 걸음씩 꿈을 향해 나아가던 때였다. 가르치고 운영하는 것은 물론 승합차를 직접 운전해 원아들 등하원까지 시켰다. 교육기관 근처에 그 승합차를 주차하는 주차장이 있었는데, 어느 날인지 아침 운행을 끝내고 원으로 들어가려다가 주차장의 펜스에 기대 서 있는 꽃줄기를 보았다. 아, 순이네 사랑채 담장에 서 있던 바로 그 접시꽃이었다.


이슬이 막 스러진 듯 촉촉한 기운이 남아 있는 빨간 꽃송이에 얼굴을 대보았다. 물론 내 얼굴보다 작았다. 어릴 적 그때 대보았다면 아마 비슷했을 것 같았다. 키 큰 꽃줄기 겨드랑이에 수없이 많은 꽃들이 피어나고 있었다. 지금까지 왜 못 보았을까. 바쁜 하루하루를 사느라 그랬던 것이리라. 한동안 서서 꽃을 보았다. 그 후 몇 달 동안, 피고 지고 또 피는 흰색과 빨강 접시꽃을 보며 나 또한 그렇게 환한 얼굴이 되어 살았다.


그 후 봄에 새싹이 돋는 것과 키가 자라고 겨드랑이에서 꽃자루가 올라오는 것, 아침 이슬 촉촉이 밴 꽃이 피고 한낮 무더위를 견디는 모습, 또 꽃이 지고 난 후 씨주머니가 여무는 것을 수년 동안 지켜보았다. 그러면서 내 꿈도 저렇게 자라 여물기를 바랐다. 때론 요원할 것 같다가 또 가능할 것도 같아, 좌절하고 희망을 갖는 날이 몇 년 간 계속되었다. 글쎄, 꼭 접시꽃 덕분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게 꿈을 키우다 불혹의 나이에 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문예창작학과에 입학했다. 야간대학이었다. 다행히 그전에 대학을 마쳤기 때문에 학사특별전형으로.


낮에는 유아교육 기관의 원장으로, 밤에는 학생으로 사는 날이 십여 년 계속되었다. 그러는 동안 한 번도 제대로 아내노릇 어미노릇을 하지 못했다. 착하기만 해 무능하게까지 보였던 남편은 가장 든든한 지원자가 되었고, 어느새 청소년이 된 아이들은 응원자가 되었다. 내가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건 가족 덕분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는 왜 그다지 모든 게 더뎠던 걸까. 용렬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앞만 보고 가느라 옆이나 뒤를 돌아보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 바로 나였다.


나는 어디서든 접시꽃을 보면 카메라를 들이댄다. 찍고 싶다. 내 꿈을 향해 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서다. 키가 자랄 때 접시꽃도 나처럼 꿈을 품었으리라. 식물이든 사람이든 왜 그렇지 않으랴. 그 꿈을 품고 노력하기만 하면 어떤 형태로는 꽃을 피우게 되는 게 인생 아닐까. 세상에 있는 모든 게 나의 스승이다. 특히 자연은. 접시꽃, 고무줄놀이 하던 유년 시절을 잉태한 꽃, 꿈을 좇아가게 한 꽃.


남편이 선물해 줬던 시집 『접시꽃 당신』은 지금 없다. 옆에 살던 사람에게 빌려줬는데, 어느 날 야반도주하는 바람에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즈음 내가 살던 위성도시 변두리엔 그런 사람들이 비일비재했다. 내 꿈까지 갖고 가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멋들어진 사인은 기억 속에 생생하다. 남편은 그 시집을 건네며 내게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은연중에 알게 된  나의 꿈을 응원한다는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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