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들빼기 꽃이 그렇게 예쁜 줄 처음 알았다. 하긴 세상에 예쁘지 않은 꽃이 어디 있으랴. ‘꽃’이라는 글자 자체도 유난히 예쁘지 않은가. 하얀 목련이 지고 수수꽃다리가 필 무렵, 노란 고들빼기 꽃도 피었다. 봄바람에 하늘거리는 노란색 꽃. 엄마가 해주던 고들빼기김치의 그 고들빼기 꽃이라는 걸 몰랐다.
이 년의 계약 기간만 끝나면 꼭 이사하리라 결심했던 그 동네에서 이십여 년 살고 있던 어느 봄날이었다. 이제 사회적으로나 가정적으로 그런대로 안정되어 살만해졌다. 남편은 남편대로 나는 나대로 각자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가 자리를 잡았고, 나는 그렇게 배우고 싶던 문학 공부도 시작해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고, 마음만 먹으면 다 될 수 있을 것처럼 자신도 생겼다. 아이들도 바라는 대로 미술과 음악을 공부하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충주 산골에 작업실을 하나 마련했다. 깊은 산골 청정한 지역 농가주택을 사서 최소한으로 수리해 사용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었다. 산골에서 자란 나는 그런 집을 하나 갖고 싶었다. 최대한 도회적이지 않고 수수한 촌집 말이다. 그 집이 그랬다. 남편은 다 밀어버리고 새로 짓자고 했으나 내가 결사반대해서 그런 상태로 유지될 수 있었다. 크게 손대고 싶지 않았다. 최대한 옛날 농가의 모습 그대로 두고 싶었다.
큰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작은 안마당에 감나무 두 그루가 있고, 뒤란에 밤나무 세 그루,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는 집이었다. 바깥마당은 넓었고 한쪽에 호두나무가 파수꾼처럼 서 있었다. 소나무로 짠 마루에선 솔 향이 솔솔 피어오르고 앞산과 뒷산에선 비둘기가 사철 울던 그런 집. 뒤란 옆으로 이백 평 되는 텃밭엔, 웬만한 채소와 잡곡을 재배할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한 번도 제대로 재배해 소출을 얻은 적 없다. 때 맞춰 오고 가며 농사를 지을 수 없었으므로.
안채에는 큰방이, 마루 옆에 작은방이, 사랑채엔 역시 커다란 방이 하나 있었다. 큰방은 부엌을 겸했는데, 윗목에 피아노를 하나 갖다 놓았다. 딸은 가기만 하면 피아노 연주를 했고, 그 소리를 듣고 마을 어른들이 오시곤 했다. 마루 옆 작은방은 혼자 고요히 앉아 독서하거나 글쓰기 좋게 아늑했다. 작업실에 가면 그 작은방은 언제나 내 차지였다. 사랑채의 큰 방은 만들기 좋아하는 남편이 공작실로 쓰겠다고 했는데 실제론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워낙 모든 게 느린 양반이었으니까.
안마당 한쪽엔 꽃밭을 만들었다. 봉숭아 맨드라미 채송화 같은 정겨운 꽃씨를 뿌렸고, 목련 묘목도 심었다. 봉숭아꽃 피면 온 가족이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고 마루에 누워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었다. 두 감나무 사이엔 찔레나무가 자생했다. 노르스름한 감꽃이 감나무에 조롱조롱 매달려 있는 상상을 했고, 감꽃이 떨어져 마당에 가득하면 그것을 하나하나 주워 감꽃 목걸이를 만들리라 계획도 세웠다.
그 작업실을 처음 구입하고 집수리를 시작할 사월 초였다. 온 가족을 승합차에 태우고 출발했다. 모두 약간 들뜬 듯했다. 미대와 음대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던 아이들은 후에 창작실로 사용할 수 있다는 생각에 부푼 듯했고, 남편도 나이 들면 관심 있던 목공을 하리라 계획했던 것 같다. 불쑥 그 작업실을 구입해 놓고 손대지 못하는 나는 핀잔 들을까 걱정했는데, 모두 좋아하는 것 같아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집에서 출발하여 두 시간 가까이 되었을 때, 우리는 남한강 위에 길게 놓인 목계다리를 건넜다. 이제 좌측으로 해서 삼십여 분 더 가면 내가 산 작업실에 도착할 것이다. 막 목계다리를 건너 좌회전하는데 나는 그만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조붓한 양쪽 길가에 노란 작은 꽃이 봄바람에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온통 노랑 들판이었다. “저게 무슨 꽃이야! 아유, 예뻐!” 내 탄성에 옆자리에 있던 남편이 고개 빼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고들빼기네.” 그제야 나는 그 예쁜 꽃이 고들빼기 꽃이라는 걸 알았다.
엄마가 해준 고들빼기김치를 잘도 먹었으면서 그 식물이 꽃까지 핀다는 걸, 또 저리도 예쁜 꽃이라는 걸 생각조차 못했다. 꽃 피지 않는 식물이 어디 있으랴, 꽃 한 번 피지 않는 인생 또한 어디 있으랴마는 그걸 몰랐다. 고들빼기 꽃길은 작업실에 거의 다다를 때까지 계속되었다. 황홀했다. 나지막한 키에 아주 진하지 않고 노랗게 피어 있는 고들빼기 꽃. 비포장도로 흙길 옆에 흙먼지 뒤집어쓰고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핀 꽃. 감동적이었다.
작업실에 도착했다. 대문을 열고 나는 또 탄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주인 없는 집 마당에도 고들빼기 꽃이 지천이었다. 꽃을 밟을까 봐 마당귀를 가만가만 돌아 안채 봉당으로 올라섰고 솔 향 가득한 마루에 앉았다. 이렇게 예쁠 수가, 이렇게 고울 수가, 자연이 만들어 놓은 꽃밭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만든 꽃밭과 비교할 수 없었다. 우리가 만든 꽃밭에선 봉숭아와 맨드라미 채송화 싹이 나왔지만 거기까지도 온통 고들빼기 꽃이 잠식해 버렸다. 그래도 아쉽지 않았다.
인생에서 영원한 것이 있을까. 없다. 아무것도 없다. 지금은 그 작업실도 없다. 감꽃 목걸이를 만들어보지 못했고,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이지도 못했는데,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작업실을 팔았다. 이젠 내 기억 속에만 있는 곳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노란 꽃이 봄바람에 한들거리는 사월이 되면 영락없이 생각난다. 고들빼기 꽃은 우리 가족의 추억이 깃든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