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이 끝나갈 무렵 산과 들 또는 개울가에 지천으로 피는 꽃이 있다. 고마리다. 멀리서 보면 안개꽃처럼 보이는 꽃, 밥풀떼기나 팝콘 같기도 한 꽃, 꽃이니까 꽃이지 저게 무슨 꽃이냐고 할 정도로 작은 꽃, 흰 바탕에 꽃부리는 분홍빛인 꽃, 때론 분홍빛이 더 진하고 더 번져 있는 꽃, 꽃잎을 닫고 있는 모습이 순박한 처녀의 입술 같은 꽃. 관심을 가진 사람의 눈에만 꽃으로 보이는 꽃, 고마리 꽃.
이맘때 산과 들 어디라도 물기가 축축한 곳에 가기만 하면 영락없이 만날 수 있다. 유난히 꽃이 다닥다닥 꼭 팝콘이나 밥풀떼기처럼 붙어 있어 허기질 때는 시장기를 더하게 한다. 요즘 개울가에서 작은 꽃이 하얗게 핀 것을 본다면 그것이 바로 고마리다. 봄에 일찍 피는 봄맞이꽃보다 더 작다. 하지만 많은 꽃이 모여서 피기 때문에 눈길을 끌 수도 있다. 가만히 관찰해 보면 보통 예쁜 꽃이 아니다.
그 작고 앙증맞게 예쁜 꽃이 나는 좋다.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꽃이어서 더욱 그렇다. 어릴 적 추억이 담긴 꽃이고, 내게 위로를 건네던 꽃이고, 지금도 내 곁에 있는 꽃이어서 그렇다. 삶의 노정에서 만나는 사물과 자연, 사람 등 모든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특별하지 않은 게 없다. 나의 성정이 그런 것을 즐기기 때문일까. 내게 특별하지 않는 것들이 별로 없는 듯하다. 스스로 생각해도 쓸데없이 진지한 부부분이 있는 듯해 슬며시 웃는다. 그래서 감동을 잘하지만 상처도 잘 받는 듯해서.
내가 자란 고향 동네는 전형적인 배산임수 지형의 마을이었다. 앞개울과 뒷산은 우리들의 놀이터였다. 여름방학 내내 앞개울에서 멱 감고 다슬기 잡으며 놀았다. 여름날 비 온 후, 어레미를 갖고 나가 수풀에 대고 뜨면 미꾸라지와 모래무지 같은 물고기가 제법 잡혔다. 그 수풀 대부분이 고마리 풀이었다. 어느 때는 온통 고마리풀이 수북수북 자라 개울가를 뒤덮어 마치 댑싸리가 자라는 듯 보이기도 했다.
개학하면 여름휴가 끝난 바닷가처럼 개울이 쓸쓸하기 그지없었다. 가끔 빨래하는 아낙들이 있기는 해도, 아이들이 북적대다 떠난 개울은 한적했다. 그곳을 지키는 건 바로 고마리 꽃이었다. 빨래하러 가면 물 옆에 수북하게 자란 고마리에서 꽃망울이 맺히고 어느 날엔 화르르 피어난 것을 볼 수 있었다. 빨래는 뒷전이고 하염없이 그 꽃을 쳐다보았다. 소박하면서도 고운 모습이 시골처녀 같았다.
우리는 그때 고마리라는 풀이름을 몰랐고 ‘돼지풀’이라고 불렀다. 저렇게 예쁜 꽃을 피우는 풀이 왜 돼지풀인지 의아했던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식물도감이 있지 않았고, 식물에 얽힌 이야기를 읽을 수 있는 책이 없어 궁금증만 가중되곤 했다. 놀랍다. 이제 인터넷에서 검색해 보니 고마리를 충청도에선 돼지풀이라고 불렀다는 내용이 나왔다. 열서너 살 된 나는 동네 친구들과 돼지풀을 베러 둥구미 들고 개울가로 가곤 했는데, 그때 돼지가 먹을 수 있는 풀이어서 그렇게 부르는 줄 알았다.
남한산성 인근에 살면서 내가 자주 갔던 산은 그곳이었다. 등산 갔다가 내려오는데 골짜기 물이 내려가는 쪽을 택한 날이었다. 물기가 축축한 곳에 고마리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집안의 우환과 학업 문제를 놓고 심신이 유난히 지쳤던 시기였다. 나는 고마리 꽃 앞에 한동안 서 있었다. 어릴 적 마을 앞개울에 있던 고마리, 물고기 잡던 추억, 친구들과 풀 베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 상황에 비하면 월등이 나아진 현실이라는 걸 깨닫자, 잗다란 고마리 꽃이 내 마음을 어루만지며 위로를 건네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곳도 고향 마을처럼 배산임수 지형을 갖고 있다. 뒷산이 있고 앞에는 개울물이 흐른다. 내가 자주 산책하는 곳은 뒷산 둘레길과 앞개울 천변길이다. 요즘 앞개울 천변 산책로에는 고마리가 한창이다. 옛 추억을 생각하며 걷노라면 어느새 반환점을 돌아야 한다. 팝콘처럼 튀어 오를 것처럼 다닥다닥 매달린 꽃이 그렇게 귀엽고 풍요로울 수 없다. 서서 꽃 감상하다, 개울물에 서 있는 왜가리와 이야기도 나눈다.
이렇게 내가 가는 곳마다 고마리가 지천이다. 어디나 있는 풀이 고마리이기 때문이리라. 화려하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는 꽃, 관심을 가져야 볼 수 있을 정도로 작은 꽃, 어쩌면 내 삶도 고마리 같을까. 크게 도드라질 정도로 내세울 것 없으나 나름의 꽃 피우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작지만 자기만의 꽃을 피우는 개울가의 고마리를 보며, 오늘 나는 또 배우고 있다. 고마리는 예나 지금이나 어디를 가든지 내 곁에 있는 꽃 중의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