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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01. 2024

코스모스

   

가을을 대표하는 꽃, 코스모스. 여름이 끝나갈 무렵부터 하나둘 피기 시작해, 들판에 황금물결이 넘실댈 때 길가에도 어김없이 넘실대던 코스모스 물결. 가끔 한여름에 피는 코스모스도 있는데, 그건 철부지다. 철을 모르고 피었으니. 철부지 코스모스는 꼭 나 같다. 이 나이에도 철이 들지 않는 듯하니. 


지난주에 설악산에 다녀왔다. 아침 5시 30분에 출발해 두 명의 동행자를 집집마다 가서 태우니, 정작 출발은 7시가 되어서 했다. 도로는 한산했다. 평일이고 이른 아침이기 때문이다. 가는 길은 국도를 선택해, 양평 홍천 인제를 거쳐 한계령을 넘기로. 고속도로보다 시간은 더 걸릴 테지만 풍광은 좋으리라 생각했다. 홍천에서 인제에 이르는 산자락의 단풍도 즐길 수 있으리라.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가는 길에 단풍은 거의 없었다. 푸른 잎사귀 끝이 약간 노르스름해진 것도 있었으나 대부분 그대로 말라갔다. 구월까지 무더위가 기승을 부렸는데, 무슨 단풍을 보겠는가. 갈수록 실망은 더해갔다. 설악에서도 단풍을 볼 수 없는 것 같았다. 올해 단풍은 애초에 글렀으니 기대하지 말아야 하나, 차 안에서 우리는 설왕설래 떠들었다. 이미 단풍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걸 기정사실화하는 듯했다.


인제에 가까워졌을 때다. 창밖을 내다보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환호성을 질렀다. 코스모스다! 맞다, 기억을 되살려보니 전부터 그곳을 지날 때 코스모스 길을 만났었다. 양쪽으로 늘어선 코스모스. 아,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키가 작다. 꽃은 더 소담했으나 키가 작아 어딘지 어색했다. 처음에는 꽃만 보고 환호성 질렀던 우리가 한 마디씩 했다. 양복 입고 갓 쓴 것 같다, 외래종인가 봐, 코스모스는 큰 키가 매력인데, 저건 좀 아니야,라고. 


초등학교 4학년쯤 되었을 때다. 여름을 재촉하는 비가 흠뻑 내리고 나자, 고학년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이게 했다. 선생님들은 반별로 코스모스 모종을 나누어 주었고, 우리는 학교 길에 심었다. 거의 2km 될 정도 길가 양쪽에 드문드문 심었다. 그해 가을부터 수년 동안 그 길엔 가을이면 코스모스가 피었다. 내가 결혼하기 전까지 그랬으니 십 년도 넘게 그 코스모스 길이 유지됐다. 


중학교 마친 후 객지로 나와 살다 추석 명절 쇠러 집에 가면, 어김없이 코스모스길이 먼저 나를 반겼다. 코스모스 모종을 심으며 친구와 장난치던 일, 등굣길에 이슬 머금고 피어 있는 청초한 모습, 하굣길에 한 송이 따서 친구들과 서로 머리에 꽂아주며 웃던 일, 그때 보았던 서늘하도록 시린 하늘. 날아가던 고추잠자리. 길 아래 논에선 따사로운 햇살에 벼가 여물어가고 있었는데. 


어디 그뿐인가. 서로 객지에서 지내다 추석 쇠러 온 친구 옥이와 만나 이야기하다, 데려다주고, 다시 데려다주느라 시간이 흘러, 돋아난 달이 환하게 우리를 비추기도 했었다. 무슨 이야기 그리 많았던지. 이제 막 시작한 연애, 객지생활의 애환, 요원해지기만 하는 꿈에 대한 아쉬움, 뭐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다. 


어릴 적엔 어림도 없던 우리는 코스모스와 키 재기며 걸었다. 걷는 길은 구두 굽이 망가질 정도로 자갈투성이 비포장도로였다. 옥이네 집이 저만큼 보이면 나를 데려다 주기 위해 다시 왔던 길을 걷고 또 되돌아 걷던 우리. 꼭 잡은 손, 영원히 놓지 않을 것 같았는데. 결혼하고 아이 낳아 키우고 살림 일구느라 소식도 없이 몇 년이 흐르고 그러다 연락하고 또 그러다 끊기기도 했다. 그래도 코스모스 길 손잡고 걷던 그 우정은 변치 않았다. 늘 그 자리에 서로가 있다는 것을 아니까. 


옛 생각을 하는 사이 코스모스 길이 끝나고, 한계령 이정표가 보였다. 한계령 휴게소를 향해 가속페달을 밟았다. 장수대에도 단풍은 거의 없었다. 산자락을 타고 내려온 감국이 노랗게 피어 우리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진한 향기가 산에 진동할 것 같아 차창을 열었다. 맑은 바람이 키 작은 코스모스에 아쉬웠던 마음을 날려 보내줬다. 키가 크면 비바람에 넘어질 수 있고, 관리도 어려우니까 개량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못내 아쉬웠다. 


한계령 근처에서 단풍을 보았다. 예년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단풍은 단풍이었다. 개량종 코스모스도 코스모스인 것처럼. 동행자들은 그만큼의 단풍을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 듯했다. 한계령에서 단풍이 다 떨어진 산자락을 보며 대추차를 마셨고, 주문진 항으로 가 회를 실컷 먹었으며, 바닷가를 거닐었다. 강릉으로 가서 수십 번도 더 본 허난설헌 기념관을 다시 보고, 경포대에 올라 풍광을 즐겼다. 


어둑해질 때 강릉을 떠나 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동행자들을 모두 집까지 데려다주고 들어왔을 때, 밤 11시가 넘었다. 자리에 누웠는데 단풍보다 홍천에서 인제 가는 길에 보았던 코스모스가 눈에 어른거렸다. 어릴 적 학교 길 코스모스도. 옥이가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날이 새면 전화하리라 생각하며 잠이 들었다.   




그 학굣길 생각하면 쓴 동시에 곡을 붙인 동요가 있어 함께 붙입니다. 한 번 들어보세요. 어릴 적의 저를 만나실 겁니다. 예전에 동시와 함께 여기 올린 것도 있지만 다시 또 올립니다. ^^    

https://youtu.be/jH2aFvKL2d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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