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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명숙 Nov 03. 2024

여뀌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꽃이 여뀌다. 그저 흔하디 흔한 꽃, 아무렇게나 피어 있는 꽃, 이름도 잘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인 꽃, 발아래 밟히다시피 할 정도로 존재감 없는 꽃, 그 꽃이 여뀌다. 가을날 산길이나 들길 하다못해 개울가 어디쯤 산책하다 발밑에 보이는 꽃 같지도 않은 붉으래한 것이 보이면 그게 바로 여뀌다. 


들깨나 참깨는 가을이 되자마자 수확해야 한다. 안 그러면 하루아침에 모두 쏟아져버린다. 아직 푸릇푸릇한 대궁과 잎이 남이 있을 때, 할머니는 동악산자락 따비밭에서 깨를 베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에게 어머니는 할머니 드실 오후 새참을 준비해 주셨다. 소쿠리에 담아 이고 깨밭으로 가는 길엔 산새들 노래 즐겁고 내 발걸음도 가벼웠다. 들길 산길에 핀 가을 들꽃들을 실컷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구절초와 쑥부쟁이는 물론이고 물봉선과 짚신나물, 괴불주머니 등이 여기저기 지천으로 피었고, 여뀌가 조붓한 오솔길 가에 흐드러졌다. 나뭇잎 끝에 조금씩 물이 들기 시작할 때,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들꽃도 다투어 피었다. 익어가는 벼 포기에는 메뚜기가 자기 세상인 줄 알고 뛰어다녔고, 온통 세상이 충만하고 평온했다. 농촌의 가을은 모든 게 넉넉했다. 콩꼬투리에 콩이 여물어갔으며 어느 집 밭둑에 심은 감나무에 감도 주홍빛으로 물들었다. 


들꽃과 새소리, 산바람을 맞으며 들길을 지나 동악산 산길로 접어들면 할머니 모습이 희끄무레 보였다. 할머니! 할머니! 두어 번 부르면 깨를 베던 할머니가 허리를 펴고 나를 쳐다보셨다. 그랴! 언제나 대답은 '그래'가 아니고 ‘그랴’였다. 우리 충청도 사투리. 대답을 들으면 더 신이 나서 산길로 올라갔다. 시장기 참으며 일하는 할머니께 얼른 새참을 드리고 싶은 마음도 작용했다. 


새참은 특별한 게 아니었다. 어느 땐 삶은 국수, 어느 땐 보리밥, 아니면 고구마나 감자 삶은 것, 주전자에 담긴 물이 다였다. 소쿠리에서 하나하나 꺼내면 할머니는 물부터 마셨다. 할머니가 새참 드실 때, 난 근처에 핀 들꽃을 찾아 어슬렁댔다. 구절초 같은 들국화가 천지사방에 핀 가운데 여뀌도 끼어 있었다. “아가, 일루 와서 이거 먹어라.” 할머니의 부름에 다가가면 몇 숟가락 남긴 국수나 밥, 한두 개 남긴 고구마나 감자가 있었다. 할머니는 언제나 그렇게 새참을 남겼고 나는 남은 그것을 먹었다. 


남은 새참 먹는 옆에서 할머니는 담배를 피웠다.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 아직 따사로운 가을 햇볕, 건듯 부는 산바람, 산새들의 노랫소리,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 산 빛. 우리가 앉은 옆에도 여뀌가 피었다. 그 꽃 이름을 알지 못해 할머니께 물었다. 할머니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어릴 적엔 ‘으끼’로 알았는데, 참 이상한 이름을 가진 꽃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여뀌라는 꽃 이름을 정확하게 안 건 옛 문인 이규보의 시를 읽으면서였다. 


장녀의 무게를 지고 객지로 나와 살던 때였다. 내게 관심 보이는 청년이 있었다. 나 역시 호감을 갖고 있었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 성장과정에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청년과 관악산 등반으로 첫 데이트 비슷한 걸 하게 되었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는 입구부터 등산로 양쪽에 여뀌가 피고 있었다. 작은 키에 붉으래한 꽃대를 꼿꼿하게 쳐들고. 


할머니 생각이 났다. 아니, 정확하게 집 생각이 났고, 내가 짊어지고 있는 장녀라는 위치를 떠올렸다. 동생들 학비와 가족들 생활비를 책임지고 있는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싶은 생각이 들자, 설레던 가슴이 스르르 가라앉고 냉정해졌다. 관악산 정상까지 등반을 같이 하긴 했으나, 내 마음은 차가웠다. 그 청년과 처음이면서 마지막 데이트를 한 셈이다. 그가 적극적으로 다가왔지만 차가워진 내 마음을 돌이키진 못했다. 그래, 여뀌 탓이다. 


자주 산책하는 천변 가에 요즘 여뀌가 지천으로 피었다. 붉으래한 꽃이 스무 살 언저리의 내 마음 같아 가슴이 울컥거린다. 그래도 괜찮았는데, 나는 왜 쓸데없이 진지했을까. 집안을 책임지려고 했던 그 마음이 가상한 게 아니라 용렬했다는 걸 이제야 깨닫는다. 아무도 그 짐을 내게 지워준 사람이 없었고 지금은 식구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데. 스무 살 꽃 같은 시절에 사랑의 꽃 한 번 제대로 피우지 못한 내게 연민을 느낀다. 


그래서 나는 글 쓰는 사람이 된 것일까. 어릴 적부터 꿈이긴 했으나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계속 마음이 갈급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난 괜찮다. 젊은 날의 나에게 연민을 느끼긴 해도 후회하지는 않으니까. 순정한 마음이 남아 있기에 글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여뀌 탓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때 나의 본분을 깨닫고 충실했던 게 다행이지 않은가. 


그나저나 그 청년은 날 까맣게 잊었을까. 이제 다 무뎌져서 관악산에 가도 날 떠올리지 못할까. 그렇다면 아쉬우면서도 다행이다. 난 여뀌 피는 가을엔 가끔 생각나는데. 깨 베던 밭둑에 앉아 새참 드시던 할머니도 그립고. 그 밭둑에 피던 여뀌는 아직도 피고 있을까. 따비밭이라 경작하지 않으면 이미 수풀로 덮여 여뀌가 자라지 않을 수도 있는데. 이젠 모두 내 기억 속에만 있는 서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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