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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의 무게, 그걸 어떻게 다룰 것인가

조율자이자 중간자, 때론 방패막이 되는 컨설턴트의 이야기

by 심야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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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M 컨설턴트로 여러 해를 일해오면서 다양한 프로젝트를 겪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최근 PMO(Project Management Office)로 참여했던 프로젝트는 오랫동안 마음에 남을 것 같습니다. 육체적으로 고된 프로젝트는 아니었지만, 심리적인 무게가 훨씬 컸습니다. ‘책임’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묵직한지를 새삼 느꼈습니다.

이 글은 지금 막 컨설팅 일을 시작했거나, 앞으로 컨설턴트가 되고 싶은 분들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책에서 보는 멋지고 전략적인 컨설턴트의 모습과 실제 현장에서의 컨설턴트는 조금 다릅니다. 적어도 제 경험에서는 그렇습니다.


조율자이자 중간자, 때론 방패막이 되는 자리


이론적으로 PMO 역할은 이름 그대로 프로젝트를 관리하고 조율하는 자리입니다. 일정, 범위, 리스크, 커뮤니케이션을 책임지며, 고객사와 내부 조직 사이에서 방향을 조율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역할은 단순한 ‘관리자’의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버티는 사람’에 가깝습니다.


프로젝트는 항상 이상과 현실 사이에 놓입니다. 고객사는 전략적인 가치를 원하고, 내부 팀은 현실적인 실행 가능성을 말합니다. 저는 그 사이에서 설명하고 설득하고 조율하며, 때로는 방어해야 했습니다. 고객사로부터는 “왜 그렇게밖에 못했냐”는 말을 듣고, 내부에서는 “왜 고객을 더 설득하지 못했냐”는 말을 듣습니다. 책임은 언제나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향합니다. 그 속에서 컨설턴트는 점점 ‘전문가’보다 ‘조율자’가 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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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MO의 역할, '편하게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


제가 생각하는 PMO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모든 구성원들이 편하게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그 결과로 프로젝트가 원활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전방위적으로 지원하는 것이 PMO의 핵심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은 항상 쉬운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고객의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내부 팀의 역량과 현실을 감안해야 하고, 여러 이해관계자들의 요구를 동시에 조율해야 합니다.


이때 PMO는 ‘회색 지대’에 있는, 누구도 하고 싶지 않은 일들을 처리합니다. 각기 다른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상황에 따라 결정을 내려야 할 때도 많습니다. PMO는 이러한 상황을 해결하며 프로젝트의 전반적인 흐름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역할을 합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스트레스도 많고, 때로는 갈등을 피할 수 없지만, 바로 이 부분에서 PMO의 역할이 빛을 발합니다. 이 역할 덕분에 다른 팀들은 보다 집중하고 전문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제가 가장 싫어하는 업무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는 자리가 바로 PMO였습니다. 사람들을 만나고 조율하면서, 싫은 소리도 해야 하고, 아쉬운 소리도 해야 합니다.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지만, 역으로 싫은 소리도 듣고 원망을 사는 자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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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은 지는 것이 아니라 ‘다루는’ 것


이번 프로젝트는 2단계로 구성되었고, 저는 1단계까지만 참여하고 빠지게 되었습니다. 외부에서는 “중간에 빠졌구나”라고 볼 수도 있지만, 그건 ‘역할이 종료되었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더 이상 제가 기여할 수 있는 지점이 아니라면, 그 자리에 계속 머무는 것도 책임 있는 선택이 아닐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처음에는 죄책감이 컸습니다. 마치 무언가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한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이 또한 책임을 다루는 한 방식이라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책임은 무조건 끝까지 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위치와 영향력을 정확히 판단하고, 필요한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컨설턴트는 정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많은 초보 컨설턴트들이 ‘정답을 말해야 한다’는 강박을 가집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하지만 컨설팅은 문제의 정답을 맞히는 게임이 아닙니다. 현실이라는 복잡한 무대에서, 가장 실행 가능한 답을 찾아가는 일입니다. 이 일에는 정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균형입니다.


완벽한 제안도 고객 조직 내에서 작동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컨설턴트는 현실과 타협하면서도 핵심 가치를 놓치지 않는 균형을 고민합니다. 그 면에서 컨설팅은 기술적인 문제를 넘어서, 태도와 사고의 문제입니다.


감정보다 구조를 먼저 보는 훈련


컨설팅 현장은 감정이 자주 개입되는 곳입니다. 프로젝트가 늦어지면 불만이 터지고, 방향이 흔들리면 서로를 탓하게 됩니다. 초보 컨설턴트일수록 이 감정의 파도에 쉽게 휘말리곤 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감정보다 구조입니다.


왜 이런 말이 나왔는지, 누구의 이해관계에서 비롯된 것인지, 지금 어떤 흐름이 프로젝트를 좌우하고 있는지. 그런 구조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감정적으로 반응하기보다는 상황을 설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중심을 잡고 효율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후배에게 전하고 싶은 말


이 일을 오래 하다 보면, 모든 프로젝트가 성공적일 수는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어떤 프로젝트는 흐지부지 끝나고, 어떤 프로젝트는 조용히 빠져나오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내가 뭘 잘못했나”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너무 자책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프로젝트는 하나의 전쟁이 아니라, 여러 장면들이 이어지는 드라마입니다. 한 장면에서 제가 할 수 있는 만큼 했다면,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런 장면들이 모여 결국 ‘경력’이라는 스토리가 됩니다.


실패해도 좋습니다. 실수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그 책임을 어떻게 다룰지 고민하는 태도입니다. 그 고민이 결국 좋은 컨설턴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컨설팅은 외유내강의 직업입니다. 말은 부드럽고 태도는 겸손하지만, 내면은 단단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면, 오늘의 작은 고민과 실수조차도 언젠가 여러분을 좋은 컨설턴트로 만들어줄 것이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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