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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재우 Jul 01. 2019

#222 그들에겐 그들에게 맞는 연장이 있고

2008년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났을 때 미국 경제의 최전선에서 진두지휘를 했던 사람은 미국 연방준비제도위원회 의장 벤 버냉키였다. 그는 1929년에 일어난 세계 경제 대공황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는데, 한 동료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버냉키는 이렇게 답했다. “지질학을 이해하려면 대지진을 깊게 공부해야 하듯이, 경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분야의 대재앙에 대해 계속 연구를 해야한다.” 나는 지질학을 공부한 사람도, 경제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아니지만 버냉키의 통찰력은 100% 납득할 수 있다. 고만고만한 지진 여러 개를 얇게 연구하는 것보다 굵직한 하나에 천착하면 본질에 대한 이해가 깊어진다는 통찰. 내가 하루키의 글을 틈틈이 계속 들추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루키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하루키가 그렇게 직접 표현했다는 것은 아니고, 그의 작업 방식을 읽으며 내가 깨달은 사실에 가깝다. 글을 쓸 때 가장 중요한 요소는 누가 뭐래도 ‘글감’이다. 글감이 또렷해야 컨셉도 잡히고, 메시지도 나오고, 힘이 실린 펜도 쭉쭉 움직인다. 


그래서 글쓰는 이들은 글감을 얻기 위해 고군분투하는데, 전쟁터에 직접 뛰어드는 헤밍웨이 같은 사람도, 교수들 저리가라 할 정도로 자료 조사를 하는 조정래 같은 사람도, 아니면 혈관 속에 알콜이 팽팽 돌도록 술을 들이켜 일부러 환각 상태로 들어가는 에드가 앨런 포 같은 사람도 있다. 방법은 다양하지만 ‘저 정도라면 어디 한 번 나도’ 같은 생각이 쉽게 들지 않는다는 점에 있어서는 똑같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해야만 글을 쓸 수 있다면 서점의 신간 코너는 대형 마트 카운터 옆의 껌 판매대처럼 작아질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다행히도 다른 길이 있는 것 같다. 손에 칼빈 소총이나 위스키 병을 들지 않아도 오랫동안 양질의 글을 써내는 작가가 있고, 그 중 대표적인 사람이 하루키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을 쓰지 않는 기간에는 그저 일상 속에서 주위에 귀를 기울인다고. 가게 주인이 하는 말이나, 마주치는 거래처 사람이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의 행동거지를 유심히 관찰하는 것이다. 여기서는 일체의 판단을 하지 않는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저 힘을 뺀 채 그 일상의 것들을 고스란히 흡수하는 느낌으로 주의깊게 받아들일 뿐이다. 그런 ‘작업’을 일정 시간 하다보면 나름의 ‘글감’이 머릿속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는데, 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다음 소설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고 하루키는 말했다. 일상이 쌓여서 소설이 된다. 그야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방법이다. 


솔직히 나는 아직 그가 말하는 ‘글감’이 무엇인지 실감하진 못했다. 힘을 빼고 일상을 주의깊게 받아들이면, 흑백 사진을 뽑는데 실수로 들어간 컬러처럼 ‘어라?’하는 지점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말을 할 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꼭 ‘크음’ 하는 헛기침을 넣는 어르신도, 바늘처럼 가느다란 얼굴에 맑게 쏘아보는 눈빛이 인상적인 중년 남성도, 말투가 너무 고와서 옆자리에서 수다만 떨어도 귀가 저절로 그리 향하는 아가씨도 보았다. 그런 장면들은 스냅 사진처럼 분명 기억 속에 남았다. 


하지만 거기까지. 창고 속의 글감들이 저절로 엉겨붙어 리코타치즈처럼 덩어리가 되어야 하는데 그 단계에 있어서 나에게는 아무런 ‘매직’이 일어나지 않았다. 내 상상력이 부족할 수도, 아니면 내가 소설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그럴 수도 있다. 하루키는 하루키 손에 맞는 망치를 들고, 하루키가 못질을 하는 방식으로 40년 동안 집을 지어왔으니까, 그 요령을 원데이 클래스로 듣는다고 해서 내가 '하루키 스타일 맨숀'을 뚝딱 지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라는 대지진이 나에게 힘이 되는 지점은 이것이다. 까치가 떨어진 나뭇가지를 주워모아 둥지를 만들듯이, 크게 눈을 뜨고 주위를 살펴보면 반드시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있다는 사실. 그렇다. 보석들은 널려있다. 다만 나에게 그것을 알아볼 눈과 가까이 다가갈 부지런함이 없을 뿐이다. 누군가는 평범한 그것들을 주워 대 저택을 만들지 않나. 그런데 나는 둥지 하나 못 만들까봐 지레 걱정할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인가. 


글을 쓸 때 나는 그랬다. 한참 동안 작업을 하지 않고 쉬면 내 안에 무언가 쌓이는 느낌이 들긴 했다. 유명한 사람들이 말하는 ‘재충전의 시간’이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속이 제법 찼다는 느낌이 들 때 자연스럽게 작업을 시작하는데, 처음에는 굉장히 쓸 것이 많다는 자신감이 충만하다.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 여기서 읽은 글 저기서 읽은 글. 이 정도 쌓아놓은 재고면 주유소에서 기름을 가득 채우듯 한 동안 연료 게이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예외없이 착각. 게이지의 바늘은 F에서 E를 향해 거짓말처럼 뚝뚝 떨어진다. 이대로 가면 곧 기름을 넣으라는 경고등의 불이 들어올 것만 같다. 


신기한 것은 그 즈음이다. 거기에 닿은 순간부터 게이지는 더 떨어지지 않고 멈춘다. 대략적인 느낌으로 말하자면 Full을 가리키는 연료통에서 3/4만큼은 순식간에 날아가버리는 대신 1/4쯤 남은 상태에서 무한 주행 모드로 변하는 것 같다. 매일 글감이 솟고, 매일 자리에 앉는다. 결국 무언가 읽을만한 것을 만들어낸다. ‘무에서 유를 창조’했다고 거창하게 표현하기는 그렇지만, 적어도 장을 본지 한참 지난 냉장고를 뒤져 그럭저럭 끼니거리를 차리는 정도는 되는 것이다. 당장 내일 무얼 요리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제도 오늘도 그런 상태에서 어떻게든 살림을 꾸려왔으니 내일 아침에도 어떻게든 잘 쓰여 지겠지. 내일의 걱정은 내일에 맡기면 된다. 뮤지컬 <레 미제라블>에서 장발장이 노래하듯이 말이다. 


“내일이 오면, 또 다른 운명이 기다리고 있겠지(One day more. Another day, another destiny.)"


사람은 자기의 그릇이 있다. 그릇이 크다 작다를 말하고자 함이 아니다. 모양이 다르다는 뜻이다. 나라는 그릇의 생김을 알아갈수록 다른 사람의 그릇을 부러워 하는 일도, 나의 그릇과 남의 그릇을 비교하는 일도 줄어든다. 지금 여기 이렇게 살고 있으므로, 살아있는 한 나에게 주어진 그릇을 열심히 빚어가야 한다. 나는 캘빈 소총이나 위스키를 손에 들고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작가로서 그런 삶도 꽤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들에게는 그들 손에 익은 연장이 있고, 나는 나에게 맞는 연장이 있다. 둥지에서 저택으로 나아가려면 나의 것을  가지고 계속 뚝딱 거리는 수밖에 없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방법을 이리저리 찾아가며 말이다.  


대지진을 통해 지질학을 이해하고, 1929년 경제 공황을 통해 2008년 서브 프라임을 헤쳐가고, 하루키의 방식을 통해 자신의 글쓰기를 익혀 간다. 그러므로 어쩌면 글을 쓰는 방법을 익힌다는 것은 곧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익힌다는 말과 같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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