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뒷산에 올랐다 내려오는 길에 죽은 고양이를 보았다. 새끼였다. 등은 검고 다리와 발은 흰색이었다. 자동차들이 줄지어 주차를 해놓은 길 가. 자세히 볼 용기는 없었지만 자동차에 치어 죽은 것 같았다. 자동차 바퀴 뒤에 기대고 자다가 그랬을지도 모른다. 너무 어려서 자동차 바퀴가 무엇인지 미처 몰랐을 수도. 나는 그저 그 아이가 아픈 줄 모르고 순식간에 숨이 끊어졌기만을 바랐다.
고양이를 보니 대부도에 갔다가 올라오던 몇 해 전의 일이 생각났다. 편도로 2차선의 시골길이었는데 저만치 앞에서 가던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홱 틀었다. 깜짝 놀라 속도를 줄이면서 보니 찻길 한 가운데에 강아지가 죽어 있었다. 길 가에는 안절부절 못하는 어미 누렁이가 있었다. 어미 주위로 어린 강아지들 몇 마리가 뛰어다녔다. 어미가 제지할 새도 없이 철없는 녀석 하나가 어미가 도로로 기어 나왔으리라. 그 아이는 아마 자동차가 무엇인지, 차도가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변을 당했을 것이다. 나는 비상등을 깜빡이며 천천히 차선을 옮겼다. 뒤따라 오던 차들도 연이어 비상등을 켰다.
생명의 죽음은 늘 가슴이 아프다. 어린 생명일수록 그 아픔이 더하다. 생명 뿐만 아니라 그 생명에 깃든 가능성까지 함께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을 좀 더 살았으면 마땅히 맛보았을 기쁨과 행복은 그 생명의 몫이다.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이 세상의 한 조각을 채우고 있다. 고양이에게도 고양이 나름의 기쁨이 있고, 강아지에게도 강아지 본연의 행복이 있을텐데, 뜻하지 않은 죽음은 그런 것들까지 깨끗이 쓸어간다. 이 세상에 있는 기쁨과 행복의 총량에서 어느 한 부분이 흔적도 없이 지워진 느낌이 든다.
우리 엄마에게는 남동생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에게는 외삼촌인 셈이다. 대학에 다닐 무렵 베트남 전이 터졌다. 정부에서는 반공이라고 했지만 이역만리 타지의 정글 속으로 총을 메고 들어가는 이유가 외화 벌이임을 대학생인 외삼촌이 모를리는 없었다. 당시 베트남 참전으로 정부가 벌어들인 돈과 미국의 차관은 10억 달러가 넘었으니까. 1970년대 GDP의 13%쯤 되는 돈이었다. 외삼촌은 베트남에 가기 싫어 도망을 다녔다고 했다. 어디로 얼마나 도망을 다녔는지는 모르지만 결국에는 붙잡혔고, 매를 맞으며 끌려갔다. 전쟁이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시기였다.
조금만 견디면 된다고 했지만, 결국에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총에 맞아 전사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나서야 전쟁이 끝났다. 전사한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파병을 떠나던 날 외삼촌은 세상이 떠나갈 듯 서럽게 펑펑 울었다. 엄마는 외삼촌이 울었던 이유가, 아마 그렇게 될 줄 알아서 였을거라고 했다. 엄마는 지금도 현충일이 되면 국립묘지에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가 온다.
'당신이 헛되이 보낸 오늘은 어제 죽은 사람이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던 내일이다.' 라는 말이 있다. 시간의 가치는 균일하지 않다. 아니, 원래는 균일한 것인데, 그 위에 우리의 어리석음이 다른 색깔을 덧칠해 버린다. 시험을 한 달 앞둔 즈음의 한 시간과 시험 전 날의 한 시간에 공부하는 태도가 각각 다르다면, 어리석음이 덧칠된 자리다. 컨디션이 좋은 어느 날 저녁을 맥주와 넷플릭스로 흘려 보내면서, 몸져 누운 다음에 ‘건강만 받쳐 준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텐데’ 라고 후회한다면, 어리석음이 덧칠된 자리다. 그래서 어제 죽은 사람이 계산하는 오늘의 가치와, 내일도 살 사람이 계산하는 오늘의 가치는 다르다. 전자는 전 재산도 아깝지 않지만, 후자는 약간의 소일거리만 줘도 헐 값에 팔아버린다. 모두가 어리석음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나는 옛날부터 '소일(消日)거리’라는 단어가 싫었다. ‘소일(消日)’의 '소(消)’는 소각할 때의 ‘소’다. 살아야 할 날(日)들이 지루해서 쓰레기를 소각하듯이 태워 없앨 만 한 일을 찾는 것, 그것이 소일거리다. 그러므로 소일거리의 어리석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지루해서 몸을 배배 꼬며 소일거리를 찾던 사람도, 남아있는 시간이 얼마 되지 않음을 알면 하루라도 더 살기 위해 반드시 아등바등할테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법륜스님에게 물었다. 우울함과 원통함이 가득한 목소리로 병원에서 시한부 판정을 받아 살 날이 1년 남짓 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스님은 이렇게 답했다. 살 수 있는 날이 1년이나 있으면서 무슨 다 죽어가는 목소리를 하고 있느냐고. 보살님보다 나이 덜 먹은 사람 중에 그 1년 안에 먼저 세상을 떠날 사람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해 보았냐고. 살 수 있는 날까지 열심히 행복하게 살아야지, 억울하다는 소리가 왜 나오냐고. 그 말에 아주머니는 표정을 바꾸었다. 목소리에 깃든 억울함이 녹아서 없어졌다.
살아 있는 한 열심히, 그리고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 새끼 고양이와 어린 강아지에게 미안해서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