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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mmm Jun 22. 2024

그랜드 투어, 파트 2 시작

떠난 자리의 허전함을 채운 시그나기

평온하고 안온했던 예레반에서 5박을 지낸 뒤, 아르메니아를 떠나 조지아로 넘어갔다. 육로로 넘어가는 여정에서 눈부시게 아름다운 세반 호수를 지나 조지아 수도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그랜드 투어를 시작한 지 69일이 되는 날 조지아에서, 동생 부부와 친구는 개인적인 사정으로 먼저 한국으로 떠났다. 갑작스럽게 결정하게 되었고 예기치 못했던 이별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이들을 보내고 이제부터는 다섯 명이서 여행을 계속하게 되었다. 인원이 반 가까이로 줄어 우리 다섯은 허전함을 애써 누르며 시그나기라는 작은 도시로 향했다.




엄마와 이모가 10년 전 조지아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숙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엄마, 이모, 아빠가 몇 개월 전에도 방문했던 곳이라 홈스테이 주인과 그녀의 어머니는 우리를 가족처럼 맞이했다. 오랜 시간의 운전으로 피로한 상태였던 우리에게 그들은 홈메이드 와인을 내주었다. 와인의 기원국이라는 조지아는 가정집에서 와인을 만드는 연례행사 문화가 있다고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서 김장하는 것처럼 그들은 직접 키운 포도로 수백 리터씩 만들어 일 년 내내 즐긴다고 한다.


투박한 유리 주전자에 가득 담아 온 와인. 와인잔에 따라주는 오동통한 할머님의 손을 보며 나의 할머니 생각이 났다. 밥 먹은 지 한 시간도 안 돼서 배 안 고프냐고 묻는 할머니처럼, 잔을 반도 비우기 전에 계속 따라주었다. 이 집 와인은 색깔부터가 일반 와인과 달랐다. 농후한 홍시처럼 주홍빛이면서도 나무에서 떨어진 낙엽처럼 갈색빛이었다. 맛도 흔히 아는 레드 와인이나 화이트 와인 맛이 아니었다. 상큼한 주스 같으면서 과즙에서 나오는 달콤함이 적절하게 발효되어 아주 살짝 톡 쏘기까지 했다. 온 입안이 싱그러운 포도밭이 되는 맛이었다.




홈스테이 주인 나토, 남편 바코, 할머님과 우리 다섯은 4인 테이블에 둘러앉아 와인을 마시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다. 나토 가족 모두 웃음이 넘치는 사람들이다. 특히 나토는 환하게 웃으며 건배 제의를 쉬지 않고 하는 열정을 보였다. 조지아의 건배 문화는 잔을 드는 순간마다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을 건배사로 하는 거라며 표현을 아끼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그녀의 건배사는 다양했다. 10년이 지나 다시 찾아와 준 마음에 대한 감동, 다섯 식구가 함께 여행할 수 있는 행운, 이렇게 잔을 부딪히며 주고받는 웃음과 정으로 세상에 전쟁도 사라지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달콤한 홈메이드 와인을 즐기며 웃고 있었지만 세상의 평화를 논하는 나토의 눈빛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앉아 와인잔을 비우고 채우며 시간을 보냈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쓸쓸하던 마음이 바로 따뜻한 우정으로 채워졌다.



8인이 시작한 여행은 5인으로 인원이 줄었지만, 아직 한 달이라는 시간이 남아있었다. 그랜드 투어의 두 번째 챕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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