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가족에게 배운 교훈
시그나기는 평온하고 고요한 동네다. 이곳에서 지내는 3일 동안 골목길을 산책하며 어떠한 소음도 없는 마을을 만끽했다. 구석구석 고즈넉함으로 가득해 모든 순간이 명상하듯 편안했다. 무엇보다 언제나 해맑은 홈스테이 가족들이 있어 아침저녁으로 그들과 인사하는 찰나들도 힐링이었다.
4일째 되는 날, 시그나기를 떠나기 슬펐지만, 설레는 저녁 약속이 기다리고 있어 조금 덜 아쉬웠다. 홈스테이 주인, 나토와 그녀의 남편, 바코는 현재 딸 둘과 트빌리시에서 살고 있다. 그들은 우리를 트빌리시 집으로 저녁 식사를 초대했다. 트빌리시 숙소에 체크인을 한 뒤, 외곽에 위치한 나토네 집으로 향했다. 나토가 사는 곳은 구시가지와 전혀 다른, 우리나라 옛날 아파트 단지와 같은 곳이었다. 조지아 친구가 있어 현지인들이 사는 동네에도 가게 되어 기뻤다.
집 안에는 나토와 바코, 그리고 두 딸들이 우리를 환하게 반겼다. 현재 대학생이라는 카토와 케토는 따스한 눈빛과 마음을 가진 나토와 바코를 쏙 빼닮았다. 이 친구들의 웃는 얼굴은 꽃다발 같이 화사했다. 그들의 환영을 맞으며 입구에서부터 최고의 디너가 될 것이란 걸 직감했다.
집 안으로 들어가 구경을 하는데 조지아의 가정집에서 내가 어릴 적 살던 집이 보였다. 진한 갈색 나무벽도, 추억의 동그란 문잡이도 초등학교 때 살았던 집과 같았다. 어린 시절 추억도 떠오르고 사랑스러운 네 가족의 애정이 집안 곳곳에 묻어 있어서 정겨웠다.
크리스마스를 한 달 앞둔 즈음이었는데 거실 겸 다이닝 룸에는 화려한 크리스마스트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매 년, 트리 앞에 모여 금색 공부터 은색 장화, 하얀 루돌프에 빨간 리본 장식을 하나하나 다는 그들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추운 겨울날 갓 구운 붕어빵을 먹을 때처럼 가슴이 따뜻해졌다.
트리 옆 식탁에는 조지아식 ‘상다리 부러지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바코의 어머님이 손수 빚어 보낸 조지아식 만두, 킹칼리부터 매콤한 치킨 스튜, 조지아식 뚝배기 돼지고기 감자구이, 오자쿠리까지. 비트색을 입힌 분홍빛 양배추 피클, 싱그러운 파슬리 토핑의 비트 샐러드, 그리고 강낭콩 샐러드까지 샐러드만 세 가지 종류가 있었다. 거기에 조지아식 스프링롤 튀김과 우리를 위해 준비했다는 볶음밥 등, 부엌에서 음식이 끊임없이 나왔다.
푸짐한 저녁 상과 더불어 케토와 카토의 호기심 가득한 질문들도 좋았다. 둘은 한국과 남편의 나라, 베트남에 대해서 이것저것 궁금한 것이 많았다. 반대로 우리도 조지아의 문화, 사람,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 적극적으로 물으며 대화를 이어갔다. 각 나라의 대사들이 모인 디너파티를 연상케 하는 문화 교류 시간이었다.
이 날 나눈 수많은 대화 중, 나의 뇌리에 박힌 것이 있다. 초롱초롱한 눈빛을 한 나토의 가족은 남편이 자신들의 첫 베트남 친구라며, 그들에겐 남편이 베트남의 대표 얼굴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우리는 모두 웃음이 터졌고 나는 그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도 나토의 가족에겐 첫 한국 친구이고, 그들도 나의 유일한 조지아 친구들이다. 그러니 우리는 서로에게 자신의 나라를 대표하는 얼굴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전 세계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 다니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만약 나라를 대표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졌었다면 더 성숙하게 행동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누군가에게는 유일하게 만나는 한국인일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구나 싶었다. 지나간 과거는 어찌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국가대표’라는 사명감을 가지고 언행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겠다고 다짐했다.
무엇보다 나에게 조지아의 국가대표인 나토, 바코, 케토, 카토는 무척이나 좋은 사람들이다. 또 아르메니아에서 만난 오페라 가수 부부, 리아나와 아르만도 그렇고. 아르슬란밥의 홈스테이 가족들도 나에겐 최고의 키르기스스탄 국가대표다. 이렇게나 멋지고 따뜻한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는 생각에 감사하다. 감사한 만큼 나도 누군가에게 이들처럼 긍정적이고 애정이 가는 한국의 국가대표가 되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