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중 깨달은 일상의 고귀함
동생 부부와 친구가 한국으로 떠나고부터는 스케줄이 조금 여유롭게 짜였다. 각자 자율적으로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는 여유 시간도 많았다. 그래서 남편과 둘이 트빌리시 데이트를 하기도 하면서 목적지 없이 새로운 거리를 거닐어 보기도 했다.
하루는 몸이 안 좋은 남편은 숙소에서 쉬게 되었고 나는 처음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 여행하는 내내 붙어있다가 혼자 나가려니 어색함이 느껴졌다. 어색하게 느끼는 내가 이상했다. 원래 혼자서도 잘 노는 편인데, 어떻게 혼자 노는지 까먹은 기분이었다.
혼자서 무얼 할까 잠시 고민해 보는 중 한국에서 주기적으로 가는 교보문고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그 감정 덕에 트빌리시의 서점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숙소를 나서려는데 엄마도 서점에 갈 일이 있다고 했다. 그 말에 이모도 아빠도 함께 가겠다고 했다. 결국 혼자만의 시간은 없겠군 싶었지만 서점에 대한 설렘이 혼자 보내는 시간보다 커서 그저 좋았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30분 즈음 걸어 서점 입구에 도착했다. 도로변 건물의 아치형 통로를 통과해 들어가니 고요한 건물 속 정원이 있었다. 자박자박 고인 빗물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고, 서점 안의 은은한 불빛이 유리창 너머로 비추고 있었다.
동네 책방보다는 조금 크지만 책 종류가 방대하지는 않은 서점이었다. 읽을 수 있는 책보단 읽지 못하는 책이 많았지만 곳곳에 진열돼 있는 조지아어 종이서적을 괜스레 펼쳐봤다. 매끈한 표지를 펼치면 어떤 책은 새하얗고, 어떤 책은 누렇고, 또 어떤 책은 반들반들, 다른 책은 거칠하고. 이 책 저 책 촉감을 느껴보며 오랜만에 종이책에서 나는 기분 좋은 설렘을 만끽했다.
책 구경을 실컷 한 후에 서점 옆 건물에 있는 북카페로 갔다.
‘지금이 기회다!’고 생각했다.
아빠가 한쪽에 앉아 책을 펼쳐 읽기 시작했고, 나는 반대편 코너에 있는 2인 테이블에 앉았다. 나만의 시간을 잠깐이라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작은 테이블에 커피 트레이와 나의 그랜드 투어 저널, 그리고 여행하는 내내 모은 엽서를 꺼냈다.
눈앞에 놓인 따뜻한 커피 한 잔, 공책, 엽서 꾸러미를 보니 방금 인화한 가족사진을 보는 것처럼 흐뭇하고, 고맙고, 따뜻했다. 카페 측에서 음악을 틀지 않아 고요했다. 유일하게 귀에 들리는 소리는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 밖에 빗소리, 그리고 한두 명의 소곤거리는 말소리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하거나 하며 각자의 세상에 빠져있었다. 이제 나도 내 세상으로 빠져들어갈 차례였다.
갓 내린 아메리카노 한 잔을 한 모금하는 것으로 심호흡을 가다듬고, 저널을 펼쳤다. 고요함과 부드러운 합창을 하듯 연주하는 백색 소음을 배경으로 끄적끄적 글을 썼다. 온전하게 나의 생각에 집중하면서, 나를 둘러싼 북카페의 평온함을 즐기며, 비 오는 날의 습도에 맞게 차분해진 마음에 몰입했다.
저널에 적은 문장은 이랬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온전하게 평화롭다. 이게 뭐 별거라고 이렇게까지 좋은가 싶은데 가슴이 설레고 행복한 걸. 오랜만에 이런 일상적이고 소소한 혼자만의 글쓰기 시간을 오랜만에 선물 받았다. 이 순간의 고귀함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달았다.”
끝으로 로마 콜로세움을 배경으로 한 19세기 즈음의 모습을 그린 엽서를 골라 나에게 편지 한 장을 썼다. 일생 중 최고의 기회이자 배움으로 가득한 그랜드 투어를 하면서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던 나에게 위로를 담아 꾹꾹 눌러썼다. 엽서와 저널에 적어 내려가며 스스로에게 힐링을 선물했다.
여행을 시작한 지 2달 반. 73일간 7개의 나라를 여행했고, 트빌리시는 40번째 도시였다. 73일 만에 처음 가졌던 나와의 데이트. 너무 오랜만이었어서 그 희열이 더 강했을지도 모른다. 1시간도 되지 않는 시간이었지만 그때 느낀 안온함은 그랜드 투어에서 가장 소중한 순간들의 리스트에 올리게 되었다.
p.s.
여행이 끝나고 몇 개월이 흐른 지금 브런치 글을 작성하기 전, 이날 쓴 엽서를 꺼내 읽었다.
“미래에 다시 읽으며 이런 고민을 했구나 하고 어렴풋이 기억하며, 그런 지금의 내가 귀엽다는 듯 웃을 나를 위해 쓰는 기록이기도 해. 보면서 입가에 미소가 달콤하게 머금어졌기를 바라며… 사랑해, 고마워.”
과거의 나에게 사랑 고백을 받았다. 엽서에 적은 대로 나는 문장을 읽으며 정말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